[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2)

입력 1998-09-16 19:23수정 2009-09-25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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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달의 잠행 (28)

햇볕으로 부터 보호하느라 종이로 하나 하나씩 가지에 열린 배를 싸 둔 배나무 과수원을 지나 산 속의 못가에 지어진 방갈로로 들어갔다. 방갈로들은 조그마한 목조집들이었는데 수상 가옥처럼 물 위에 떠 있었다. 신발은 들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는 개망초꽃이 하얗게 핀 맞은편 못 가장자리와 배나무 과수원과 먼 산들과 하늘과 휘핑해놓은 크림처럼 부드럽고 커다란 여름의 뭉게구름들이 보였다. 환한 한낮의 햇빛이 비쳐들지만 에어컨으로 냉방된 공기가 차가워서 햇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뜨거움이 완벽하게 제거된 채 단지 환하기만 한 비물질적인 여름 빛. 나는 그의 입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무언가 내 존재를 두껍게 도포했던 각질층이 갈라지고 나 아닌 것이, 두렵도록 낯선 존재가 튕겨져 나가는 듯했다. 나는 무화되는 일종의 공포 때문에 커다랗게 고함을 쳤다.

―영화에서 들은 이야긴데, 옛날에 지도 그리는 사람들은 지도가 끝나는 지점의 바깥 여백에 용의 나라라고 썼대요. 용의 나라… 난 지금, 지도의 바깥, 용의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에요.

가쁜 숨이 지나가고 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고요해지자 나는 그의 품에 거꾸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아니,… 내 위로 올라와.

그가 내 몸을 끌어올렸다. 절정에 이르는 순간 그의 표정은 얼굴 속에서 금세라도 다른 얼굴이 튀어나올 것만 같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존재의 변이. 그러나 그 몇 초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를 내려다보는 그 표정은 흡사 깊고 투명한 물 속의 고기떼를 헤아리는 선사처럼 지극히 명징하고 숭고해진다. 우리는 한동안 해변에 밀려 온 익사자들처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채로 숨만 내쉬었다. 한참 뒤에 그의 손이 나의 몸을 쓰다듬고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잘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내가 좋아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게임을 위험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 속에는 그 말이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내가 좋아요? 그 말은 뻥 터져버릴 것만 같이 부풀어올랐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7월과 8월의 많은 날이 흘러갔다. 내 일생만큼이나 많은 날들이. 그 많은 바닷가의 마을들, 국도변의 모텔들, 작은 저수지들, 양치류가 우거진 무성한 숲의 그늘들, 휴게소에서의 만남과 엇갈림들… 모텔에서 그는 내 몸을 씻어 준 적이 있었다. 두 손에 새하얀 거품을 잔뜩 내어 따뜻한 아이스크림 같은 거품을 나의 머리카락과 팔과 다리와 가슴과 배와 등과 사타구니에 바르고 나의 손안에 넘치도록 가득히 담아 주었다. 그의 손바닥은 크고 약간 딱딱하고 꺼칠했다. 그가 내 몸을 물로 헹구고 수건으로 닦아 줄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관절들이 저려왔다. 나는 얼마나 고독했던가. 나는 얼마나 방치 되어 있었던가. 오래도록… 나는 그가 너무나 필요해서 그 육체에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8월의 마지막 주에 그의 가족이 왔다. 그 집 여자는 소문처럼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곱슬거리는 긴 파마 머리에 마치 주부 에어로빅 선수처럼 단련된 몸매를 가진 40대 초반의 작고 동글동글한 여자였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들로 보였다. 그들은 방학이 끝나는 8월 마지막 주까지 머물거라고 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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