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19)

  • 입력 1998년 8월 9일 20시 27분


제1장 나에게도 애인이 있었다 (19)

미흔은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손을 내리고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왼쪽 눈은 부풀어오른 피부에 덮여버렸고 오른쪽 눈만 보였다.

‘병원에 가자.’

나는 미흔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내가 그녀의 몸을 일으키려 하자 미흔은 나의 팔을 세게 후려쳤다. 미흔은 계속해서 두 팔을 휘저으며 나의 가슴과 어깨 얼굴을 때리려했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미흔은 분명한 발음으로 내뱉었다.

‘넌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내게 손 대면 죽여버릴 거야.’

미흔은 그 날부터 일주일 동안 잠을 잤다. 미흔이 마침내 침실 문을 열고 걸어나와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나는 미흔이 일주일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부기는 거의 가라앉았으나 전체적인 얼굴 선이 늘어진 것 같았고, 머리 부분이 커졌으며, 이마에는 혈관이 튀어 올라 있었다.

스위스제 접는 칼이 한 얼굴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의 표정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꼭 쥘 수 없을 것 같은 무감각해 보이는 손과 흡사 바닥에서 떠 있는 것 같은 두 발, 무엇보다 타버린 재처럼 숨소리 속에 흩어지는 깨어진 영혼의 먼지…. 흡사 상부가 떨어져나간 거대한 탑의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압력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았다. 두통 때문이었다. 미흔은 투명인간처럼 머리를 감고 우두커니 앉아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미흔은 다섯 번이나 가방을 잃어버렸고 두 번이나 방금 구입한 물건이 들어 있었던 쇼핑백을 분실했다.

나는 번번이 가방을 찾아 그 날 들른 곳을 거꾸로 돌아다녀야 했다. 나는 끔찍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묵묵히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녔다. 다섯번은 되찾았고 두 번은 완전히 분실했다. 그로 인해 지갑과 함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도 분실했는데 미흔은 무심한 채로 그냥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미흔이 바보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도 미흔은 병원에 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좌절해 이미 무심해 진 것인지, 아니면 미래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 때문인지, 혹은 상처 자체를 그처럼 수치스러워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식당에서 음식을 씹다가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며 참혹한 눈빛이 되었다. 가방을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 같았다. 가방은 불과 30분 전에 식당문 앞에서 내가 뺏다시피 해서 챙겨두었던 터였다. 내가 가방을 들어올려 보여주자 미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가방이 자기 것이라는 확신조차 없는 멍하고 아득한 얼굴이었다. 잠자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났고 잠이 들면 혼수상태처럼 깊이 잤다. 잠들어 있는 미흔의 머리를 만져보면, 두피 아래층이 전체적으로 물렁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머리 속에 피가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미흔은 왜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했을까? 3개월이나 지난 뒤에야 처음으로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토요일이라 서두른 탓에 겨우 11시밖에는 되지 않았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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