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연철/훈할머니의 逆향수병

입력 1998-07-12 20:19수정 2009-09-25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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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 유명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작품 중에는 유난히 고향을 그리는 시가 많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도 제목은 ‘고향’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이 시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로 끝을 맺으며 타향에서 그리던 고향과 현실에서 만난 고향의 차이를 읊고 있다.

▼정지용이 읊은 대로 그리던 고향이 너무 달라진 탓일까. ‘훈’할머니 이남이(李男伊)씨가 ‘역(逆)향수병’에 시달리다 캄보디아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50여년만에 귀향한 훈할머니는 자신의 기구한 삶 때문이었는지 지난 5월 귀국할 때만 해도 고향에 대해서는 거의 종교적인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말을 잊고 부모도 친구도 없는 훈할머니에게 하늘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높푸르지만 그리던 고향은 옛 모습이 아니었던 듯하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TV를 보거나 올케와 화투로 소일을 하는 게 고작이라고 한다. 간혹 국제전화로 캄보디아에 두고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고 하나 ‘역향수병’을 이기기에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고국에의 ‘향수’와 대부분 삶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캄보디아에의 ‘역향수’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녀로부터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생생히 느껴진다. 고국이 이국일 수밖에 없는 훈할머니가 여생이나마 영원한 에트랑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은 없을까. 그녀를 돕는 민간단체에만 맡기지 말고 필요하다면 인류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관계당국이 해결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임연철<논설위원〉ynch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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