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한국인의 「명분과 정서」

  • 입력 1998년 3월 29일 20시 49분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친분있는 한 외교관에게 IMF시대에 한국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지 물어봤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명분과 정서’ 두가지를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에선 명분과 실리가 부닥치면 명분을, 원칙과 정서가 부닥치면 정서를 중시하는 경향을 자주 경험한다고 털어놨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조선시대 임금님도 이것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고 오늘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선 두말할 나위가 없고 ‘합리적’이어야 할 시장에서조차 명분과 정서를 강요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부실기업을 다루는 문제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요즘 뭉칫돈이 왔다갔다하는 이른바 협조융자란 것도 ‘명분’에 집착한 대표적 사례다.

협조융자가 뭔가.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빠진 대기업의 도산을 막고 자구노력의 시간을 줘서 기업을 회생시킨다는 게 주요 명분이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여기엔 출발부터 문제의 소지가 많다. A그룹의 예를 보자. 화학 유통 정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을 거느린 이 재벌의 부채비율은 약 800%. IMF위기 이후 극심한 자금난에 봉착하면서 2천4백억원의 협조융자를 긴급 수혈해 간신히 부도위기를 넘겼지만 그것도 잠깐. 2월들어 그룹전체가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물경 5천억원이 또 협조융자란 이름으로 건너갔다.한숨은 돌렸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 애초부터 예견된 상황악화다. 계열사 가운데 돈을 제대로 버는 곳은 두세개에 불과하고 어떤 계열사는 하루 결제자금이 2천억원을 넘어 아무리 돈이 들어와도 구조적인 해결이 어렵게 되어 있다.

결국 은행이 망하지 않으려면 또 돈을 대줄 수밖에 없다. 대기업만 살리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흑자도산하는 중소기업이 속출하는 마당에 돈이 대기업으로 편중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융기관과 부실 재벌이 물고 물리는 악순환적 고리로 굴러가는 그 배경엔 ‘어느 그룹이 망하면 경제가 무너진다’는 명분과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러므로 정책적인 결단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말은 요란하게 자율을 외치지만 실상은 정치적 논리와 정서를 바탕으로 방향이 정해지고 만다.

우리는 당연시하고 있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세계적 표준)의 관점에선 이것 자체가 분쟁이 될 소지가 크다.

‘IMF시장’에선 기업도 하나의 상품이다.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다. 기업이 부실하면 매각을 통해 다시 한번 활로를 찾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망해야 할 기업이 망하지 않으면 시장이 교란되고 블랙홀처럼 자금이 빨려들어가 결국엔 우량기업까지 골병들 수밖에 없다.

주류업체인 진로와 OB맥주가 그런 표본사례다. 진로는 작년 봄 부도가 나면서 즉각 화의를 신청해 모든 채무가 동결됐다. 금리도 정상기업보다 훨씬 낮은 우대금리(연12∼13%)를 적용받았다. 이자부담이 경감되고 채무가 동결되자 이 여력을 공격적 마케팅에 백분활용, 오히려 시장을 확대했다.

반면 일찍부터 구조조정을 추진한 OB의 경우 그 덕에 재무구조는 건실해졌지만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고 은행으로부터 부채상환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재무구조가 든든할 때 돈을 받아내겠다는 은행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구조조정을 성실하게 추진한 기업이 부실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꼴이다.

두 기업만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모든 업종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이제 총체적 위기 앞에서 더이상 명분과 정서를 고집할 순 없다. 부실기업엔 분명한 경영책임을 묻고 ‘시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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