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하용출/「북풍」나라 추스르는 계기로

  • 입력 1998년 3월 22일 21시 42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

하루 아침에 나라 경제가 쓰러져 국민을 놀라게 하더니 북풍1호와 2호가 우리를 경악케 하고 있다. 특정후보 음해 기도로 밝혀진 북풍1호가 정리되기도 전에 안기부와 정치권의 대선 기간 북한 카드 사용 기도로 드러난 2호는 전 안기부장의 자해소동으로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심각성은 기존의 한국정치의 터부가 벗겨졌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적으로 그동안 많은 터부들이 벗겨졌다.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으로 드러난 정경유착, 세계화 경제에서 여지없이 깨진 재벌의 신화들이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번 북풍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모든 사람들이 미심쩍게 생각하던 부분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 민주화-탈냉정의 결과물 ▼

각종 터부가 깨지는 과정을 보면 모두 민주화와 탈냉전이라는 대내외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풍 사건도 민주화, 그것도 정권 교체가 없었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북풍 사건은 서로 상충되는 두가지 놀라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거짓된 비밀이 드러난 것에 대한 안도감과 이에 따른 분노, 반면 비밀이 허술하게 무너지는 국가관리체계에 대한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국가 이익과 정권 이익의 혼란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냉전체제는 권위주의 정부에 많은 허위와 비밀을 가능케 했다. 검증하기 힘든 이데올로기 논란, 각종 선전과 조작, 과다한 경쟁의식 등이 그것이다. 서로의 접촉이 불가능했던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더욱 그랬다. 6·25 이후 냉전에 찌들며 동시에 통일의 염원을 버리지 못한 우리 국민은 정권적 이익을 위한 좋은 조작 대상이었다.

조작을 가능케 했던 두가지 요인 중 냉전체제는 아직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고 민주화도 공고화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북풍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이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겠지만 시급한 것은 민주화를 더 빨리 이루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관된 통일 정책과 통일 논의의 민주화, 정보의 공개 및 시민사회의 강화가 요청된다. 또한 시급한 일은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혀 또 하나의 미궁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이번 사건에서 안기부의 소위 ‘기밀’이 쉽게 유출된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대 사안이다. 단순하게 보면 이번 일은 정권이 교체되면서 지배층의 변화에 따른 불안감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관료체제가 지난 30년간 정치화되어 고유성과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우리 관료들은 상하 구분없이 정권 이익의 봉사에 너무 익숙해져있는 것이다. 안기부의 비밀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문건의 유출 자체가 민주화 과정에서 과거 파괴된 관료 체제 복구의 시급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출발부터 정권적 이익과 국가 이익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채 활동해온 안기부의 경우 민주화, 탈냉전, 세계화된 경제 체제하에서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냉전체제 하에서 정보는 첩보와 구별하기 어려웠고 수집된 방법 때문에 정보의 가치가 근거없이 높이 평가되곤 했다.

▼ 정보공개로 진상 밝혀져야 ▼

그러나 국내 정치의 민주화, 세계적인 정보 혁명, 첨예한 경제 경쟁, 종전과 다른 북한의 외교 전략 등은 안기부에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한마디로 검증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는 정보의 수집과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기부는 새로운 인재양성과 체제구축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대공업무 중심에서 경제 과학기술과 세계적 안목을 가진 인재의 확보 양성이 시급하다. 동시에 안기부장직의 중립성 확보, 경쟁적 정보체계의 구축 등을 통해 기관의 안정성과 독립성을 제고해야한다. 이제 음지에서 양지로만이 아니라 양지에서 양지로 지향하는 부분을 확대해야 할 시기다.

하용출<서울대교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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