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정인/「北風」 이젠 잠재워야 한다

입력 1998-03-18 19:29수정 2009-09-2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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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설마했던 ‘북풍공작’ 의혹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안기부뿐만 아니라 구 여권 지도부등 여야 정치권까지 대북 커넥션을 국내 정치공작에 역이용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가장 큰 개혁 성과의 하나로 평가되던 분야가 바로 안기부법 개정을 통한 국가정보기관의 탈정치화가 아닌가. 생각할수록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심한 배신과 분노를 느낀다.

▼ 국가안보에 손실 없어야 ▼

안기부의 존립 이유는 무엇인가. 특정 정파와 결탁해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고 체제안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국가 안보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안기부의 존재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문민정부하에서도 결국 국가정보기관이 체제안보의 하수인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말았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차제에 이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이 있어야 할 것이며 관련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북풍공작사건을 다루는 정부 여당에도 반성할 점은 있다고 본다. 안기부는 집권당의 전리품이 될 수 없다. 더욱이 안기부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국가정보기관은 보안을 생명으로 한다. 안기부를 정쟁화하고 그 과정에서 조직과 인물, 그리고 대북 사업의 윤곽을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단편적이고 성급한 정략적 정보 유출은 안기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야당 파괴 음모라는 불필요한 정치적 의혹마저 증대시킬 수 있다.

우리를 더욱 실망시키는 것은 안기부 고위관리들의 행태다. 안기부는 법으로 보장된 비밀 조직이며 상부의 명령을 천명처럼 여기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관료조직이다. 그러나 이번 북풍공작사건은 이러한 덕목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전직 고위관리들은 책임회피로 일관해 왔으며 신임 고위간부들 역시 엄정한 내부 감찰 없이 상부의 명에 따른 부하직원들만 검찰에 내주고 말았다. 이러한 고위간부들의 태도를 보고 과연 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안기부에 투신하려 하겠는가.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 한 대목을 빌려 말하자면, 잘못은 높은 사람들이 저질러 놓고 책임은 부하직원이 져야 한다면 어떻게 안기부라는 국가정보조직이 건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번 사건은 안기부 고위간부의 자질과 직업정신에 심각한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어떻게 비밀 문건으로 분류된 서류를 개인의 보신을 위해 여당 부총재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 이는 정보조직의 기본을 모르는 행위다. 더구나 논란이 되고 있는 대외비 문건은 방북자의 D―briefing에 기초한 첩보보고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검증이 안된 이런 첩보를 무책임하게 외부에 유출한 여당 부총재의 작태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국기를 뒤흔들만큼 폭발력이 있는 자료를 사실 확인없이 개인의 인기전술에 활용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남북한은 아직도 대치상태에 있다. 그리고 북한의 대남 침투 및 와해 공작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측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로 시작된 북풍사업이 북한의 역공작에 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첩보보고서 때문에 북풍사건이 새로운 정쟁으로 비화돼 국내 정치의 불안으로 이어진다면 정부 여당 야당 안기부, 심지어 언론까지도 북한의 와해공작에 놀아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 안기부 脫정치화 계기로 ▼

이제 김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다. 안기부라는 한 조직을 넘어서 국가안보체제 전체가 치명적 손실을 입기 전에 이번 사건을 정보기관의 탈정치화 및 전문화라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면서 신중하게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도 극복하기에 벅찬 이 시점에 북풍 때문에 사회가 흔들린다면 손해보는 쪽은 결국 우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연세대교수·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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