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세탁방지법 제정이 또다시 무산되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금융실명제 대체입법과 함께 추진된 돈세탁방지법 처리를 다시 유보시켰다. 음성 정치자금 차단을 위한 개혁입법을 당사자인 정치인들이 거부한 꼴이다. 그 속셈과 시대감각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뇌물과 검은 돈은 모든 부정의 온상이다. 정치권과 공무원에게 음성적으로 건네지는 돈은 정경유착의 핵심고리이자 정치와 경제의 고비용 저효율구조를 키워온 원흉이다. 그동안 횡행해온 모든 뇌물성 돈거래는 불로소득의 심리를 부추겨 건전한 경제마인드 정착을 방해하고 소득의 정당성을 훼손함으로써 국민간에 위화감과 불신풍조를 만연시켰다.
때문에 검은 돈, 특히 기업과 정치권 사이의 음성자금 거래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화한 국민정서다. 지난번 한보사태와 관련해 정치인들이 조건없이 받은 돈에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한 사법당국의 판단은 이같은 국민의 법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변해야 할 정치권만이 이같은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양식과 개혁의지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돈세탁방지법 처리를 미룬 정치권의 결정은 국제시류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한 기업을 처벌하기 위해 뇌물방지협약을 마련하고 서명국 국회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근본취지가 같은 돈세탁방지법은 외면하고 국제협약은 비준하게 된다면 한국 국회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비아냥을 살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경제의 개혁과제 중 하나로 정경유착관행을 지적하고 있다. 실행계획 점검과정에서 돈세탁방지법 유보를 들어 우리의 의지를 다시 의심하기라도 한다면 창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