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허목 vs 송시열]남인-서인의 거두

  • 입력 1997년 12월 20일 08시 07분


조선 붕당정치의 두 거목 송시열과 허목. 이들은 서인과 남인의 영수로서 대결의 길을 걸으며 부침을 거듭했다. 한 사람이 승하면 한 사람은 패하는, 그런 시소같은 삶이었다. 29세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스승이 되었던 송시열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43세가 되던 1650년 정계 진출과 낙향을 반복한 뒤 58년 51세에 다시 조정에 나와 북벌 계획을 추진하고 이조판서에 올라 정치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허목은 50대까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열중했다.그러다 효종의 간곡한 권유로 1657년 회갑을 넘은 63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에 나갔다. 이들의 첫 격돌은 1659년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일면서. 이때 서인인 송시열이 승리했고 남인 허목은 패배, 삼척부사로 좌천당했다. 15년 뒤 2차 예송논쟁이 다시 일었다. 이때는 남인의 승리. 조정은 남인의 손에 넘어갔고 허목은 이조판서가 되어 재기했지만 송시열은 유배의 길을 떠났다. 권력을 장악한 남인들은 그러나 송시열의 처벌을 놓고 둘로 나뉘었다. 남인들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자 숙종은 허목을 우의정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끝없는 갈등으로 남인은 세력까지 잃고 말았다. 남인의 몰락은 곧 서인의 득세로 이어지고 송시열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조정에 다시 나와 즉각 남인제거에 나섰다(경신환국).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남인의 거두 허목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고 깨끗한 그의 품성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서인이 분열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던 송시열은 세자책봉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 유배당했고 결국 사약까지 받아야했다. 그러나 허목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줄곧 고향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글을 쓰다가 송시열보다 8년 뒤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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