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진 상황을 이야기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전후 유럽이다. 물건을 사기 위해 리어카에 지폐를 가득 실어 날랐다든지월급날 돈가방을 메고 출근을 했다는 일화는 이제 고전처럼 되었다. 80년대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달러 환율이 시시각각 달라져 숙박요금을 매일 정산하라는 호텔측과 이를 거부하는 손님 사이에 시비가 붙곤 했다. 90년대초 브라질에서는 정부예산 숫자가 너무 길어 일반 계산기로는 처리를 못할 정도였다.
▼최근까지도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시장경제 도입 후인 92년 한 해 물가가 2,500%나 올라 「물가 지옥」이 연출됐다. 그러던 러시아의 올 예상 물가 상승률이 12%라니 놀랄 만한 안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단 폭락한 화폐가치는 돌아설 줄 몰라 지금도 1달러에 5천8백루블의 비율로 교환되고 있다.
▼단위가 너무 커 웬만한 돈은 돈같지가 않다는 것이 러사아를 여행한 사람들의 경험담이다. 택시를 타고 요금을 10달러만 내면 될 것을 거의 6만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거리에 떨어진 5백루블짜리 지폐는 거지도 안줍는다』는 말이 허풍만은 아닌 듯싶다. 수표는 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최고 50만루블짜리 지폐도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생활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엊그제 1천루블을 1루블로 하는 화폐단위 개혁을 내년 1월1일자로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내년 한 해 동안은 신구화폐를 함께 통용하고 99년부터 구화폐는 사용이 금지되지만 2002년 까지는 은행에서 교환해준다는 것이다. 화폐개혁의 시점과 그 절상폭을 미리 알린 것도 이채롭다. 러시아가 이번 개혁에 성공해 시장경제의 꽃을 피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