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지의 거대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10대, 30대그룹 부도설이 꼬리를 문다. 이렇게 가다간 과연 몇개 그룹이나 생존할 것인지 재계가 부도공포에 휩싸여 있다. 금융계는 부도루머를 좇아 피해줄이기에 급급하고 정부는 수습은커녕 방관하는 태도다. 이런 와중에 루머는 하루가 멀다하고 확대재생산되고 금융기관은 여신중단과 회수에 골몰, 신용공황을 방불케 한다. 자금시장경색 부도발생 부도루머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연초 한보사태 이후 반복되고 있다.
뒤늦게 군살빼기에 나선 기업들이 부동산과 계열사를 내놓고 있으나 살 사람이 없다. 부동산가격의 폭락 조짐은 당연하다. 대기업 부도사태와 담보부동산가격 하락이 부실채권 증가로 이어져 금융기관 파산을 초래하는 이른바 일본식 복합불황이 우려된다.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들이 국내은행의 신용등급 낮추기에 나섰고 해외자금 차입금리가 높아지는 등 외환위기도 우려된다. 회생기미를 보이던 경기가 다시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가 이처럼 파국으로 치닫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정부의 태도는 무책임 수준을 넘어섰다. 기아(起亞)그룹을 회생시키느냐 마느냐는 개별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정부는 인식해야 한다. 개별기업 문제는 채권은행과 기업이 알아서 처리하라든지 빈껍데기만 남은 거대은행에 자금지원을 못한다는 정부관계자의 원론적인 발언은 불난 데 기름 끼얹는 격이다. 1차적인 책임은 기업과 은행에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수습능력을 잃었는데도 알아서 해결하라면 결과는 뻔하다.
정부가 주장하듯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부실기업과 부실은행을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옳다. 문제는 지금같은 위기국면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장원리에 모든 걸 맡겨도 좋은지에 있다. 오늘의 위기는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오랜 관치(官治)금융, 낙후한 금융산업, 취약한 경쟁력,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시장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그걸 바로잡는 과도기다. 그런데도 정착되지 않은 시장원리만 고집한다면 정부가 위기관리기능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부실기업과 한계산업정리 등 구조조정은 불황기에 강도높게 추진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 일본은 수년간 복합불황을 감내하며 구조조정에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기술과 자본 기업체질 경쟁력 등 저력을 갖춘 일본처럼 우리도 몇년간 복합불황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충격요법으로 무리하게 구조조정을 하다가 경제가 복원력(復元力)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정부는 금융마비와 부도도미노 수습에 확고한 원칙을 제시하며 적극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금융기관에 신뢰감을 주어 금융시스템의 불안해소가 가능하다. 계열기업과 부동산을 과감하게 처분, 체질을 강화하는 기업에만 회생기회를 주어 구조조정을 촉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경제관료들이 경제난 극복에 손을 놓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권말기 레임덕현상을 엄중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 또한 대선(大選)에만 매달리지 말고 경제위기를 타개하는 데 행정부와 머리를 맞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