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젖는 것들 〈14〉
그날 두 시간 정도 숲길을 걷거나 겨울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참으로 많은 얘기를 했다.
『저는 회색을 참 좋아하거든요. 이 다음 차를 사게 되면 꼭 회색 차를 갖고 싶어요』
왜 그러냐고 묻자 눈에 확연히 띄는 강렬함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왠지 무던히 넓게 느껴져 다른 색들을 다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흰색처럼 맑은 것도 포용하고 또 검은 색처럼 어두움도 지닐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가련하고 소심하잖아요,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 대비 속에 중간으로도 인정되지 못하고요. 어느 색보다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는데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고요. 회색지대라거나 회색분자라는 말을 쓸 때도 그렇고요』
아마 그건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이곳 생활에 대해 단편적으로 하는 말들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그날 마치 그녀는 자신이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열심히 보여주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처음엔 이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그래,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말하는 그녀조차 이야기 속의 자신에 대해 낯설어하고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따가 돌아갈 때 이제까지 쓴 자기의 일기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건 명혜씨가 보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억지로라도 그녀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반은 어떤 의무감 속에서라도 받아야겠지만, 그러나 그런 일은 서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저는 또 쓰면 되니까요』
그녀는 마치 같은 물건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거나 구할 수 있는 어린 아이가 먼저 가지고 있던 물건을 선뜻 친구에게 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명혜씨가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 겠 어 요?』
『이젠 처음 모습과도 많이 달라요.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아마 찢어버리게 되고 말 거예요. 대신 오빠에겐 그런 걸 받았다고 말하지 말고요』
『언제까지 여기에 있게 되죠?』
『그건 아무도 몰라요. 아직 제가 원하지도 않고요. 밖에 있을 땐 여기에 들어오는 일을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내가 바깥 세계로 나가서 잘 섞일 수 있을까 두려워요. 당장 운하씨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아마 그녀도 그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 여자 친구는 잘 있나요?』
『예』
그는 짧게 대답했고,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기다려요. 지금 가지고 나올게요』
<글:이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