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이문열/망해가는 말

  • 입력 1997년 4월 30일 22시 37분


세상이 망하려면 먼저 말이 망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말과 글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네가지 대죄(大罪)에 넣어 엄히 벌하였다. 또 부처같이 자비로운 분도 악한 혀를 벌하기 위해 발설지옥(拔舌地獄)을 만들었고 우리 향당(鄕黨)의 습속은 망발(妄發)한 입을 찢었다. ▼ 「전업주부 창녀論」 ▼ 지금 세상이 장차 망하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 청문회를 겪으면서 말이 얼마나 망했는지는 가늠이 간다. 사기와 횡령은 기업정신으로 위장되고 외압에의 굴종, 혹은 부패는 소신에 찬 결정으로 강변된다. 깃털은 몸통과 동의어가 되고 사원(私怨)에 찬 폭로는 목숨을 건 고발정신으로 둔갑한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일은 말이 망해가는 곳이 정치판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일이 다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경제에서도, 사회에서도, 문화에서도 말이 망해가고 있는 것은 이제 한 조짐이 아니라 공공연한 현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여성계 일부에서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망발은 걱정스러움을 넘어 전율까지 자아낸다. 지난해에 한 여성은 어떤 문학잡지에서 현숙한 전업가정주부들을 모조리 창녀로 규정하는 「창녀론」을 폈다. 잘못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부들이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편의 벌이에 더부살이하는 점에 착안한 논의로 보인다. 그런데 며칠전 한 여성은 거기서 한술 더떠 국내 굴지의 일간지에다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張氏)를 매춘부라고 공공연하게 매도했다. 정부인 장씨는 퇴계학의 한 종사(宗師)요 숙종조 영남남인의 영수였던 葛庵(갈암) 李玄逸(이현일)의 어머니가 된다. 남편 아들 손자 3대에서 이른바 칠산림(七山林)을 배출한 현모양처로서 영남지방에서는 신사임당과 나란히 우러름을 받는 분이다. 안동에서는 해마다 휘호대회를 열어 그분을 추모할 정도다. 그런 분을 매춘부로 몰아가는 논의대로라면 신사임당도 갈데 없는 매춘부가 되고 자신의 일과 벌이를 가질 수 없었던 조선시대의 모든 여인들도 매춘부가 된다. 뿐인가. 지금도 자신의 일과 벌이를 갖지 못한 여성은 모두 매춘부가 되며 남성의 태반은 매춘부와 살고 있는 꼴이 된다. 거기다가 더 참혹한 것은 그같은 논의를 펴고 있는 그 여성들의 어머니도 열에 아홉은 매춘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보다 한세대는 앞선 여성들이라 자신의 일과 벌이를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존중되는 시대라 하지만 말이 이렇게 망할 수는 없다. 제 어미 제 할미를 매춘부로 몰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성의 태반을 모욕하는 말도 온전한 말일 수 있는가. ▼ 同性을 모욕하는 망발 ▼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들이 여성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요즘들어 활기있게 논의되는 페미니즘 운동과도 실상은 무관함을 알고 있다. 기껏해야 어물전의 꼴뚜기거나 어디가 잘못되어 갈팡질팡 널을 뛰고 있는 여자들로 짐작한다. 특히 정부인을 매춘부로 매도한 쪽은 자신의 마뜩치 못한 행실이나 결혼이력을 변호하려다 망발의 늪으로 빠져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든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러한 망발이 여성계를 대표하는 목소리이며 한국 현대 여성운동의 의식수준이나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단언하거니와 그렇게 망해버린 말로 지켜질 수 있는 세계는 없다. 이미 망해버린 말을 따라 망할 것은 여성계나 여성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다. 이문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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