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

  • 입력 1997년 3월 31일 19시 48분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지(民族紙) 동아일보가 오늘로 창간 77주년을 맞는다. 사람의 생애에 비추면 예순의 회갑(回甲), 일흔의 고희(古稀)를 지나 어느덧 희수(喜壽)의 기쁨을 나누는 연륜이다. 본보가 이처럼 긴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우뚝 선 것은 항상 민족 전체의 표현기관으로서 오직 민족과 함께 영욕(榮辱)을 같이해왔고 민족과 함께 시련을 이겨왔기 때문이다. 독자와 함께, 국민과 함께 또 역사와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해온 신문이기에 동아의 오늘이 있음을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77년 전 오늘 본보는 저 유명한 창간사(創刊辭)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워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문화주의를 제창했다. 일제(日帝) 암흑기에 민족주의를 창간 이유의 첫번째로 내세운 것은 한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은 일본 천황제 파쇼를 거부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창간주지(創刊主旨)야말로 77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족과 나라의 나아갈 바 앞날을 밝히는 미래 지향적 비전으로 빛을 발한다. 창간주지는 혼신의 힘으로 실천돼 왔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민족독립을 요구하며 일장기(日章旗)말소사건으로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백두산탐방과 현충사를 중건하고 영정을 봉안한 이충무공유적 보존운동, 권율장군사당 보수사업, 민중속으로 들어가 계몽하는 브나로드운동 등으로 민족의 얼과 자존을 지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해방공간에서는 민주주의 기치를 내세워 건국에 이바지했고 정부수립 이후에는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 항거하여 민주화로 가는 이행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창간주지를 실천적으로 이어받아 민족의 자존과 나라사랑에 이바지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과 건국을 위해 몸바친 많은 선인들과 민주화투쟁에 나선 젊은이들의 숱한 희생 위에 이룩한 우리 삶의 터전은 그러나 본보의 나라사랑 정신을 잣대로 하여 볼 때 참담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가. 본보 발행인이 연두제언(年頭提言)에서 지적한 그대로 지금은 실로 국가적 난국이자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공동체를 엄습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우선 정통성의 위기로부터 비롯한다.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 정당하게 선출되는 절차와 과정이 정부정통성의 근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제대로 선출된 정부라도 부패하여 깨끗하지 못하거나 효율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정통성을 상실한다. 이 점에서 현정부는 정통성의 상당부분을 잃고 있다. 지금은 합리성의 위기다. 무엇보다 경제가 경제논리로 운영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휩쓸리면서 정경유착의 부패고리에 발목이 잡혀 시장경제의 근간인 합리성과 효율성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에 동기부여의 위기가 겹쳤다.아무도 신바람나게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다. 현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의 심각한 회의와 엄청난 민심이반의 저변에는 국제화시대 한국경제의 장래에 대한 불안, 누적된 중고년(中高年) 실업과 대기업의 잇따른 도산, 저성장 긴축정책으로 인한 고용불안, 대졸자들의 취업난, 그리고 일부 계층의 호화와 사치로 인한 위화감이 짙게 깔려 있다. 일자리도 문제지만 일한 만큼 거둔다는 확신이 없는 곳에 동기부여가 제대로 될 까닭이 없다. 사회 각계각층에 무력감과 의욕상실증이 팽배해 있다.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다. 여야의 정치적 이해가 갈수록 분극화(分極化)하면서 위기탈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의 이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 위기감의 끝없는 증폭은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싸움에도 그 깊은 뿌리가 있다. 그러나 시련과 도전이 아무리 가파르다 해도 이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 동아일보는 창간 77주년을 맞아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면서 여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재천명하고자 한다. 첫째, 동아일보는 연두제언에서 제창한 바, 국민통합을 위한 의식혁명에 앞장설 것이다. 무엇보다 올 연말 대통령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그리고 선거결과를 온 국민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모범적인 선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도하고 논평하며 감시할 것이다. 그를 위해 우리는 불편부당 시시비비 비판적 중립을 견지할 것이다. 둘째, 동아일보는 도덕성 회복에 앞장설 것이다. 반칙이 판을 치는 사회, 정직하게 살면 바보가 되는 부끄러운 사회를 이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땅에 떨어진 윤리와 갈수록 심성(心性)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회악을 가차없이 고발하고 그럼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정신적 기둥인 도덕성을 건강하게 일으켜 세우는 데 온 힘을 다 할 것이다. 셋째, 동아일보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고자 한다. 그러자면 먼저 법치주의 원칙을 지켜 법과 절차에 충실해야 한다. 국가가 일차적으로 신경써야 할 일은 고용의 보장과 일터의 창출, 실업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동시에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잣대로 사회를 지켜나가야 한다.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공정한 경쟁과 공정한 분배가 보장되는 사회, 노력한 만큼 얻고 일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사회,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엄정하게 징벌받는 그런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다. 변칙과 야합, 이합집산을 속성으로 하는 정치의 세계에도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의 잣대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감과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려면 우선 민족의 자존심과 긍지부터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를 위해 우리는 제자리 제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 다른 한 손이 모르게 남을 돕는 사람, 정의(正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의인(義人)들의 삶을 적극 보도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등불로 삼고자 한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과제들을 위해 건강한 여론형성에 발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동체구성원 모두의 호응과 참여 없이는 이룩해내기 힘든 일이다. 국민도 이제 나라의 위기는 바로 자신의 위기임을 바로 보아야 할 때가 왔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국가장래를 함께 생각할 때다. 엄격한 자기비판과 검증도 있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도 이런 검증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애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성원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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