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산책]송영/유산 이야기

  • 입력 1997년 3월 29일 20시 15분


조그만 규모의 문구제조업을 하는 친구가 요즘 자기는 일기를 쓰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일기를 쓰기에 바쁘다고 엄살을 피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 자식에게 남겨줄 「일기」 ▼ 그는 대학을 나온 뒤 큰 회사에 잠시 근무하다가 곧 자기 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한 길만 걸어온 사람이다. 날고 뛰는 사람이 많은 요즘 세상에 이 정도면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친구가 갑자기 일기를 쓴다니. 더구나 글쓰는 것과는 천리나 거리가 먼 친구가. 그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쓴다는 일기는 현재 생활을 기록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 하나하나 기록해내는 그런 소급형 일기였다. 『그런 걸 만들어 뭣에 쓰나』 나는 그 얘기가 너무 엉뚱해서 물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그 기록을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말했다. 곰곰 생각해 봤는데 자기가 물려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어느날 모재벌이 2세에게 막대한 유산을 넘겨주느라고 거액의 상속세를 물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것을 읽은 뒤 갑자기 자기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거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소규모 문구제조업으로 가족들 생계를 꾸려왔고 세 명의 자녀를 대학교육까지 받도록 뒷바라지를 해왔는데 그의 능력은 거기서 그치고 따로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이건 아닌데. 이건 너무 못나고 평범한 부모가 아닌가』 그는 좀 특별한 부모가 되고 싶은 허영심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허영심이지만 이런 허영심이라면 백번이라도 권장할 일이다. 처음 그는 자서전 형식을 취할까 했으나 재주도 모자라고 무엇보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내용이 거창한 자서전과는 너무 걸맞지 않을 것 같아 평범한 삶도 쉽게 담아지는 일기형식을 선택했다. 그는 자기는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살아온 셈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런 자부심이 없다면 자기의 평범한 삶의 기록을 자식들에게 액면 그대로 전할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쉽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는 건 쉽지 않다. 기록이란 행위 그 자체가 거짓이나 과장을 배척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서툴게 그것을 쓰더라도, 그리고 그 내용에 흥미를 끌 만한 그럴 듯한 사건 하나가 없더라도 그 일기는 틀림없이 그의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유산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권력이나 많은 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재산보다 성실한 삶을 ▼ 「빵은 얻었으나 정작 삶의 질을 가늠하는 가치는 상실했다」. 이것은 경제개발 이후 사회의 정신풍토를 얘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말이다. 이 말은 2세들에게 더욱 효용성을 지닌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들의 행위에 그 아비가 책임이 있듯이 기성세대는 2세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줬지만 정작 가치있는 삶의 길을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이 있다. 어떻게 사는게 자신의 삶도 충실하게 가꾸고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를 위해서도 이로운 삶이 되는가.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한 마디로 자르는 명쾌한 즉답을 내려 남에게 그걸 강요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가르칠 책임은 분명 부모나 기성세대에게 있다. 친구의 때늦은 일기는 그런 노력의 출발처럼 보여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송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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