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비서 출국 이모저모]황장엽 『인간적 대우에 감사』

  • 입력 1997년 3월 19일 21시 43분


[북경〓황의봉 특파원] 『인간적으로 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黃長燁(황장엽)북한노동당비서는 34일간 머물렀던 주중(駐中)한국대사관 영사부를 떠나면서 자신의 영사부생활을 책임진 南相旭(남상욱)총영사에게 밝은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황비서가 영사부를 떠난 지 하루만인 19일 오전 황비서가 머물렀던 영사부 건물 2층방 등을 공개하면서 황비서가 「정신력과 극기력이 무섭도록 강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영사부에 들어온 첫날 자술서를 쓸 때 매우 긴장된 상황에서도 파지(破紙)한장 내지 않은 채 침착하게 써내려가더라는 것. 또 鄭鍾旭(정종욱)대사가 4,5차례 영사부를 방문, 환담하는 자리에서도 내용에 관계없이 정대사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중국과의 협상결과 「한국직행이 어렵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도 동요의 빛이 없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대사관의 한 고위당국자는 이날 오후 황비서 체류기간중 우리측이 가장 신경쓴 부분은 그의 신변안전 문제였다며 『이 때문에 영사부와 인접한 콩고대사관 사이의 담이 낮은 점을 우려한 중국공안이 저격수를 배치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우리측은 중국 공안당국에 영사부 경비인력의 야식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정중히 거절, 성의표시 차원에서 음료수를 제공했으며 중국은 관할권을 주장한 만큼 경비업무 등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자체 부담했다. 그러나 李鵬(이붕)총리가 14일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외교적 비호권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이 보호조치를 안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돼 내부적으로 미묘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 당국자는 회고. 이 당국자는 또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부자가 남북한정상회담과 관련, 논쟁을 벌이다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황비서가 털어놓았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이 보도가 나간 뒤 북한측이 중국측에 『이 보도를 보라. 황이 서울로 가면 더 날조된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 한때 망명협상이 어려움에 봉착했었다고 전했다. 북한측과의 직접접촉 여부에 대해 이 당국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으며 쌀 등 대북지원문제가 논의된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황비서 망명신청 이틀후인 지난달 1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韓中(한중)외무장관회담이 협상을 풀어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술회. 영사부는 황비서가 떠남에 따라 이날 24일로 예정된 정상업무 재개를 위해 아침부터 그동안 쌓인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정돈을 하느라 부산한 분위기. 영사부 주변에는 국제결혼서류를 떼려는 조선족 여성들을 비롯해 30여명의 민원인들이 찾아와 업무재개시점을 문의. 흑룡강성 오상시에서 왔다는 김모 여인은 『일주일째 여관에서 묵으며 업무재개를 기다려왔다』고 고충을 토로하면서 『한달째 여관에서 묵고 있는 조선족들도 부지기수』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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