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8)

  • 입력 1997년 1월 8일 20시 18분


첫사랑〈8〉 어쩌면 그때까지 그 여자 아이의 가슴을 키워왔던 것의 팔할은 자기 몸에 대해서거나 혹은 늘 활자로만 봐온 「비극적이면서도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그런 은밀한 호기심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그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벗은 여자의 가슴을 그려보았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사진 속의 그림처럼 자기 가슴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따라 그대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집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리고 창문도 꼭꼭 닫고 커튼도 꼭꼭 쳤지만, 물기 가득한 열아홉 살 맨몸으로 욕실을 나갈 수는 없고, 처음엔 거울 옆에 바짝 옆모습으로 붙어서서 물을 묻혀 그냥 손가락 끝으로 그려보았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왼쪽발이었다면 오른쪽발은 정말로 그것을 그렇게 그려보고 싶다는 것, 여자 아이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릴 만한 무엇이 없을까. 같은 밝음이라 하더라도 욕실 안 전등 아래에서의 밝음과 욕실 밖 햇빛 아래에서의 밝음의 차이가 그런 것이니까. 하나는 그 은밀함이 부끄럽지 않고, 하나는 여지없이 부끄러워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 그게 있었지. 여자 아이는 욕실로 들어오는 문턱에 있는 엄마의 드레스실을 떠올렸습니다. 정확하게는 그 드레스실 한편에 커다란 거울을 붙여 만든 화장대였고, 그 화장대 앞 어느 자리엔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을 루즈였습니다. 여자 아이는 살며시 문을 밀고 한쪽 발로만 드레스실로 나가 마치 그것을 훔쳐오기라도 하듯 얼른 루즈 하나를 집어 왔습니다.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루즈였습니다. 그것으로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까 물로 그릴 때처럼 욕조 안으로 들어가 거울 옆에 바짝 붙어서서 거울과 거기에 비치는 가슴의 각도를 맞추고, 그렇게 맞춘 가슴이 움직이지 않도록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는 옆구리에 붙이고 팔꿈치 끝과 루즈를 쥔 손의 손목만 움직여 거울에 비치는 모습 그대로 자기의 가슴을 그려보았던 것입니다. 거울에 은밀하게 자기 가슴을 그려본다는 것, 그것도 루즈로. 어쩌면 그것은 어느 젊은 여자 화가가 아틀리에의 문을 꼭꼭 닫고 마치 숨어서 그 작업을 하듯 자기의 누드화를 그릴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술을 떠나 우선 그 행위의 은밀함만 따진다면 말입니다. 화가가 자기 작품 아래 사인을 하듯 그렇게 그린 가슴 아래에 이름도 썼습니다. 루즈로 그린 그림 아래 루즈로 채서영이라고. <글 : 이 순 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