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배구가 실패한 이유? 황택의 같은 세터를 애지중지하니까![발리볼 비키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7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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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아시안게임 마지막 게임을 준비 중인 한국 대표팀. 아시아배구연맹(AVC) 제공
항저우 아시안게임 마지막 게임을 준비 중인 한국 대표팀. 아시아배구연맹(AVC) 제공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이 그래도 체면치레는 했습니다.

한국은 26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7, 8위 결정전에서 인도네시아에 3-2(29-27, 19-25, 25-19, 21-25, 15-8) 진땀승을 거뒀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2006년 도하 대회 이후 17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가져오겠다’면서 베테랑 세터 한선수(38·대한항공)를 긴급 수혈하고 항저우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개회식을 치르기도 전에 메달 경쟁에서 탈락했고 결국 61년 만에 ‘노메달’로 대회를 마무리했습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배구 대표팀 주장 황택의. 항저우=뉴스1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배구 대표팀 주장 황택의. 항저우=뉴스1
한국 남자 배구 문제가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선수는 황택의(27·상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택의가 그저 자기보다 11살이나 많은 한선수도 밀어내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국 배구 관계자가 ‘선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황택의이기 때문입니다.

황택의를 ‘좋은 세터’라고 평가하는 그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 남자 배구는 앞으로도 안 될 겁니다.

2016~2017시즌 프로배구 남자부 신인상을 받은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2016~2017시즌 프로배구 남자부 신인상을 받은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황택의는 성균관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6~2017 신인 드래프트 때 전체 1순위로 KB손해보험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세터가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은 건 황택의가 처음이었습니다.

데뷔 시즌 신인상을 차지한 황택의는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를 통해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0~2021시즌 프로배구 ‘연봉 퀸’에 오른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2020~2021시즌 프로배구 ‘연봉 퀸’에 오른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소속팀 KB손해보험 역시 황택의를 엘리트로 대우했습니다.

KB손해보험은 2020~2021시즌 개막을 앞두고 황택의와 연봉 7억3000만 원에 계약했습니다.

황택의는 그러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 최고 세터라는 평을 듣는 황택의를 제치고 프로배구 ‘연봉 킹’이 됐습니다.

프로 데뷔 후 네 시즌 동안 한 번도 팀을 ‘봄 배구’로 이끈 적이 없는 세터인데도 그랬습니다.

7시즌 동안 KB손해보험 주전 세터로 활약한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7시즌 동안 KB손해보험 주전 세터로 활약한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이에 대해 배구계에서는 KB손해보험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 획득을 1년 앞두고 있던 황택의와 미리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실제로 KB손해보험은 2020~2021시즌 10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지만 주전 세터였던 황택의의 연봉은 7억3000만 원에서 1원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FA 자격 취득을 앞두고 연봉으로 이렇게 ‘보호막’을 쳐뒀다는 건 KB손해보험에서 그만큼 황택의를 아낀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를 노리는 구단이 따로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로 ‘너희 팀에 지금 필요한 선수를 줄 테니 황택의를 달라’는 제안을 받을 때마다 KB손해보험은 ‘노 생큐’를 외쳤습니다.

서브를 넣고 있는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서브를 넣고 있는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황택의가 ‘엘리트 세터’라는 평을 듣는 제일 큰 이유는 ‘운동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황택의는 세터치고는 키(189cm)가 큰 데다 데뷔 시즌부터 원포인트 서버로 나설 만큼 서브도 좋습니다.

또 이번 아시안게임 프로필에 따르면 황택의는 키가 똑같은 한선수(300cm)보다 블로킹 높이(310cm)가 10cm 더 좋습니다.

이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지난해 순천·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기가 막힌 세트(토스)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빼어난 운동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황택의. SBS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빼어난 운동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황택의. SBS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그런데 운동을 잘하면 반드시 꼭 좋은 선수가 되는 걸까요?

사실 야구에서 포수가 그런 것처럼 배구에서 세터도 결국 팀 성적으로 이야기하는 포지션에 가깝습니다.

황택의가 프로 무대에서 일곱 시즌을 뛰는 동안 팀을 봄 배구 무대로 이끈 건 2020~2021시즌(3위)과 2021~2022시즌(2위) 두 번뿐입니다.

이 두 시즌 동안 황택의는 전체 세트 가운데 52.4%를 ‘말리 특급’ 케이타(22·현 베로나)에게 띄웠습니다.

케이타와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케이타와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이럴 때 배구 팬들은 몰방(沒放)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립니다.

몰방 세트에 능한 세터 역시 물론 좋은 세터입니다.

팀 주 공격수에게 잘 맞춰서 공을 띄울 줄 아는 세터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다만 원래 잘하는 선수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팀 공격력을 끌어올리는 선수가 더 좋은 세터 아닌가요?

케이타가 없을 때는 톱5에 든 적도 없는 황택의
케이타가 없을 때는 톱5에 든 적도 없는 황택의
지난 시즌 KB손해보험 선수들이 황택의가 띄운 공을 스파이크로 연결했을 때 남긴 기록을 합치면 공격 효율 0.349가 나옵니다.

지난 시즌 프로배구에서 세트 횟수가 가장 많았던 14명(=7개 팀 × 2명) 가운데 9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데뷔 시즌부터 10위 - 6위 - 6위 - 9위 - 6위 - 1위 - 9위니까 지난 시즌만 유독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은 공격수와 같이 뛸 때만 이 기록이 올라가는 선수를 좋은 세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케이타와 함께일 때는 리시브가 흔들려도 문제 없던 황택의.
케이타와 함께일 때는 리시브가 흔들려도 문제 없던 황택의.
황택의가 이 기록이 낮은 건 리시브가 흔들리면 공을 배급하는 데 애를 먹기 때문입니다.

황택의는 동료 선수가 상대 서브를 정확하게 받았을 때는 이 기록이 5위 - 2위 - 1위 - 7위 - 4위 - 1위 - 4위로 평균 3.4위였습니다.

리시브가 흔들렸을 때는 평균 7.3위(9위 - 9위 - 8위 - 10위 - 4위 - 1위 - 10위)로 순위가 떨어집니다.

보통 리시브가 흔들려도 동료 선수가 득점하기 쉽도록 공을 띄워주는 세터를 좋은 세터라고 평하지 않나요?

황택의는 본인 세팅이 흔들려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수 그러니까 케이타가 있을 때만 좋은 세터였습니다.

현대캐피탈 최민호(왼쪽)와 황택의. 동아일보DB
현대캐피탈 최민호(왼쪽)와 황택의. 동아일보DB
또 일반적으로는 상대 블로킹 벽을 잘 여는 세터를 좋은 세터라고 평합니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상대 블로커가 없거나 한 명인 곳으로 공을 띄운 경우를 ‘러닝 세트’, 두 명 이상인 곳으로 공을 띄운 경우를 ‘스틸 세트’로 구분합니다.

황택의는 프로 데뷔 후 지난 시즌까지 러닝 세트 비율 30.4%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황택의가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누적 세트 횟수가 가장 많은 14명 가운데 9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케이타와 함께일 때는 블로킹을 벗길 필요가 없던 황택의.
케이타와 함께일 때는 블로킹을 벗길 필요가 없던 황택의.
같은 기간 이 부문 1위는 한선수(39.0%)였습니다. 이어서 김명관(26·현대캐피탈)이 35.3%로 2위, 유광우(38·대한항공)이 34.9%로 3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거꾸로 김형진(28·대한항공)과 이호건(27·삼성화재)이 23.1%로 공동 최하위였고 남자부 7개 팀에서 모두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한 황동일(37)이 27.7%로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기록이 세터 평가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세터 세 명으로 팀을 꾸린다고 할 때 여러분은 한선수, 김명관, 유광우를 고르시겠습니까? 아니면 김형진, 이호건, 황동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OK금융그룹 차지환(왼쪽)을 네트 반대편에 두고 세트 중인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OK금융그룹 차지환(왼쪽)을 네트 반대편에 두고 세트 중인 황택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황택의는 지난 시즌 러닝 세트 비율 29.5%를 기록했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두 번째로 세트가 많았던 신승훈(23)은 31.2%로 러닝 세트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또 신승훈이 띄운 공을 때렸을 때 KB손해보험 선수들이 남긴 공격 효율은 0.376이었습니다.

잊은 분이 계실지 몰라서 다시 말씀드리면 황택의는 이 기록이 0.349였습니다.

KB손해보험 백업 세터 신승훈.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KB손해보험 백업 세터 신승훈.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그렇다고 신승훈이 황택의보다 더 좋은 세터라는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같은 팀에서 같은 동료와 선수 생활을 해도 기록이 차이가 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다만 이런 기록이 쌓이고 쌓여서 차이를 만들면 언젠가는 신승훈이 더 좋은 세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좋은 세터, 나쁜 세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세터처럼 플레이하는 세터가 좋은 세터니까 말입니다.

2022~2023 NBA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니콜라 요키치(오른쪽). 덴버=AP 뉴시스
2022~2023 NBA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니콜라 요키치(오른쪽). 덴버=AP 뉴시스
지난 시즌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한 건 니콜라 요키치(28·덴버)였습니다.

요키치는 NBA에서 운동 능력이 ‘없는’ 대표적인 선수로 손꼽힙니다.

구글에서 요키치가 서전트(제자리) 점프를 얼마나 뛸 수 있는지 찾아보면 ‘5인치(약 12.7cm)가 되지 않는다’는 (유머) 게시물이 뜰 정도입니다.

요키치는 점프력만 부족한 게 아니라 느려도 정말 느립니다.

니콜라 요키치 하이라이트 플레이. 유튜브 화면 캡처
니콜라 요키치 하이라이트 플레이. 유튜브 화면 캡처
그래서 무려 ‘하이라이트 필름’에 겨우(?) 이 정도 장면이 들어갈 정도입니다.

NBA 선수라면 이런 상황에서 ‘인 유어 페이스(상대 면전에 내리꽂는 덩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요키치도 자기가 NBA에서 뛰기에는 운동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세르비아 출신인 요키치는 “여기(NBA)는 선수들이 정말 너무 빠르고 정말 너무 높다. 나는 어차피 그렇게 못할 걸 알기에 그냥 ‘농구’를 하기로 했다”고 인터뷰했습니다.

어린 시절 니콜로 요키치. 사진 출처 요키치 소셜미디어
어린 시절 니콜로 요키치. 사진 출처 요키치 소셜미디어
그리고 요키치는 농구를 잘해도 정말 너무너무 너무 잘합니다.

농구 통계 사이트 바스켓볼레퍼런스(www.basketball-reference.com))에 따르면 요키치는 2021~2022시즌 PER(Player Efficiency Rating) 32.85를 남겼습니다.

윌트 체임벌린(1936~1999)이나 마이클 조던(60) 같은 NBA 전설도 이보다 PER가 높았던 시즌이 없습니다.

요키치와 반대로 체임벌린이나 조던은 운동 능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수입니다.

아데토쿤보도, 제임스도 운동 능력은 말할 것도 없는 선수
아데토쿤보도, 제임스도 운동 능력은 말할 것도 없는 선수
2000년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를 뒤흔든 ‘세이버메트릭스 혁명’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좋은 선수는, 체형이 모델 같지 않다거나, 발이 못 봐줄 정도로 느리다거나, 다른 좋은 선수와 그 무엇이 어떻게 다르든, 다른 좋은 선수와 비슷한 기록을 남긴다는 겁니다.

배구에서도 당연히 좋은 세터와 비슷한 기록을 남기는 세터가 좋은 세터입니다.

그리고 명제가 참이면 대우(對偶)도 늘 참이기에 좋지 않은 세터는 좋은 세터와 비슷한 기록을 남기지 못합니다.

파키스탄에 패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12강에서 탈락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황택의. 항저우=뉴스1
파키스탄에 패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12강에서 탈락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황택의. 항저우=뉴스1
그렇다면 케이타와 함께 할 때를 빼고는 좋은 세터와 비슷한 기록을 남긴 적이 없는 황택의를 좋은 세터로 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황택의는 국가대표 주전 세터로 나선 올해 아시아배구연맹(AVC) 챌린저대회(3위),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5위)에서도 전부 좋은 세터와 비슷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프로 무대에서도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본 적이 없는 선수에게 아시안게임 그러니까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이 경험할 수 있는 사실상 가장 큰 무대에서 성공하라는 게 정상적인 요구일까요?

KB손해보험이 황택의를 지명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황택의를 믿었던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 역시 케이타를 데려오기 전에는 아시안게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던 겁니다.

임도헌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 감독. 아시아배구연맹(AVC) 제공
임도헌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 감독. 아시아배구연맹(AVC) 제공
요컨대 한국 배구는 적어도 남자 배구는 여전히 ‘운동을 잘하는 것’과 ‘플레이를 잘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플레이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니 그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경영학의 구루(guru) 피터 드러커(1909~2005)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You can‘t measure it, You can’t manage it)고 말했지만 한국 배구는 제대로 측정할 줄 모릅니다.

아니라면 ‘특급’ 외국인 선수 없이는 실패밖에 해본 적이 없는 선수를 이렇게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p.s.

한국 배구가 측정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는 아시안게임 선수 프로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모든 선수 점프 높이가 10cm 단위로 끝납니다

일본이나 중국 선수 끝자리에는 물론 다양한 숫자가 나타납니다.

사진 출처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보 사이트
사진 출처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보 사이트
이런 작은 것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걸 세상 사람들은 ‘성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성실한 사람에게 운까지 따를 때 성공이 찾아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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