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 전기요금 못 내도 '플렉스'가 급한 한국전력 [발리볼 비키니]

황규인기자 입력 2020-11-25 17:12수정 2020-11-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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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 코리아 이미지에 프로배구 남자부 한국전력 로고를 합성
앞으로는 ‘플렉스’(‘과시’를 뜻하는 인터넷 용어)만 하지 않는다면 전기요금은 늦게 내도 괜찮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데 프로배구 남자부 한국전력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난 시즌에는 ‘사정이 어렵다’며 면제 받은 한국배구연맹(KOVO) 제재금 3억2500만 원을 이번 시즌에는 ‘원하면 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이 태도를 바꾼 이유로 다른 팀에서 지목하는 이유는 ‘투자 자랑’이다. 한국전력은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옵션 포함 3년 총액 21억 원에 박철우를 영입했고 최근 트레이드를 통해 현대캐피탈에서 국가대표 센터 신영석을 데려오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면서 18연패 기록을 끊어내고 최근 3연승에 성공했다.

KOVO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25일 “한국전력 구단 최고위층에서 실제 연봉 공개를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실무진에서 ‘그러면 KOVO 규정 위반이 된다’며 만류했지만 의사를 바꾸지 못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공개 방침은 타이밍이 뜬금없을 뿐 아니라 한국배구연맹(KOVO) 이사회(단장 모임) 결의사항 위반이라는 점에서도 문제다. KOVO 상벌규정 ‘징계 및 제제금 부과 기준’에 따라 이사회 결의사항을 위반한 구단은 먼저 1000만~2000만 원을 제재금으로 내야 한다.

KOVO는 지난해 12월 19일 이사회를 열어 2022~2023 시즌부터 샐러리캡(연봉 총액 상한선)과 별도로 ‘옵션 캡’을 마련하기로 했다. ‘옵션 캡’을 따로 마련했다는 건 이제 옵션도 제한 범위 안에서만 써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KOVO 규약 제72조⑤에는 “샐러리캡에 적용되는 선수의 연봉은 계약서에 명기된 기준연봉을 적용한다. 단, 그 밖에 옵션 등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기준 연봉’이 아니라면 얼마를 더 줘도 무관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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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캡에서 옵션을 제외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규정을 유지하고 있던 건 샐러리캡이 연봉 총액 상한선뿐 아니라 하한선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이다. 각 구단은 샐러리캡 이상으로 선수단 연봉을 지급할 수 없는 동시에 적어도 이 금액 70% 이상은 선수단 몸값으로 써야 한다.

남자부에서 이런 규정이 존재했던 이유는 사실상 ‘한국전력’ 한 팀 때문이었다. 2019~2020 시즌 남자부 샐러리캡은 26억 원이었다. 따라서 남자부 7개 구단은 18억2000만~26억 원 사이로 선수단 연봉을 유지해야 했다. 지난 시즌 한국전력 선수단 총 연봉은 14억9500만 원이 전부였다. 샐러리캡을 57.5%밖에 채우지 못했던 것.

KOVO 상벌규정 6⑤는 이럴 때 부족 금액 100%를 제재금으로 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전력은 18억2000만 원에서 14억9500만 원을 뺀 3억2500만 원을 KOVO에 내야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전력에서 이 돈을 KOVO에 납부하는 일은 없었다. KOVO 이사회에서 어려운 구장 사정을 감안해 이 제재금을 면제하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만장일치로 이런 결정이 나오자 한 매체는 “V리그는 한국 배구의 미래를 포기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전력의 제재금 면제를 결정한 고위 관계자 모두가, 그리고 13개 팀 모두가 한국 배구의 미래를 포기했다”면서 “단순히 한국전력의 규정 위반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제재금 면제는 13개 팀 모두가 언제라도, 누구나 필요에 의해 규정을 위반할 것이라는 의도를 담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한국전력은 역시나 필요에 의해 또 한번 규정을 위반하려 하고 있다. 한국전력에서 옵션 포함 연봉 공개 방침을 다른 구단에 전하자 ‘그러면 지난해 제재금 3억2500만 원은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가 당연히 나왔다.

이에 대해 다른 팀 관계자는 “한국전력에서 ‘꼭 내라면 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전력 관계자는 “큰소리를 친 건 절대 아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내야하는 일이 생기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어느 쪽이든 한국전력에서 지난 시즌 내지 않겠다던 제재금을 이번 시즌에는 ‘낼 수도 있다’고 방향을 바꾼 건 맞다. 한 남자 팀 관계자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어려울 때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면서 “저 팀은 ‘리그 질서를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겨우 3연승한 걸 가지고 이렇게 신이 난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전력에서 ‘제재금만 내면 룰은 언제든 어길 수 있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면 앞으로 KOVO 이사회 결의사항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외국인 선수를 트라이아웃(공개 선수 평가)으로 뽑기로 한 것 역시 이사회 결의사항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제 어떤 구단에서 제재금 2000만 원을 내는 대신 외국인 선수를 자유선발해 쓰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한국전력은 이사회 결의사항을 어겨도 되고 우리는 왜 안 되냐’고 하면 무어라 해야 할까.

한국전력은 나머지 팀과 달리 공기업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다. 한국전력이 얼마나 ‘공기업스러운지’는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던 본사 건물을 전남 나주시로 이전하면서 원래 쓰던 가구를 모두 가지고 내려갔다. 새로 사는 게 옮기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지만 국정감사 때 지적을 당할까 봐 미리 손을 썼던 거다. 이런 회사에서 갑자기 ‘우리는 배구 팀에 크게 투자합니다’라고 광고를 하려는 걸 보니 배구는 여전히 국회의원 눈에 잘 띄지 않는 종목인가 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경영난에 처하면서 전기요금도 제대로 내기 힘든 자영업자가 늘고 있다. 특히 관광 산업 의존도가 큰 제주 지역이 그렇다. 한국전력 제주본부에서 23일 공개한 전기요금 체납현황(3개월 이상 연체 기준)에 따르면 올해 8월까지 월 체납 규모는 19억 3700만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억3600만 원(38.2%) 늘었다.

물론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새로 생긴 체납액이 5억360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한국전력에서 FA 선수 영입에 쓴 돈이면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제주 지역 전기요금 체납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전력도 엄연한 프로배구 팀이기에 FA 시장에서 돈을 쓰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기 공급 독점권을 누리는 회사라면 FA 투자 자랑을 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얼마든 있지 않을까.

황규인기자 kin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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