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 그랜드슬램’ 김재범 코치가 정선 사북초를 찾은 사연은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12월 19일 05시 30분


14일 강원도 정선 사북초등학교에서 ‘강원랜드 레전드 초청 스포츠 꿈나무 교실’이 열렸다. 재능기부를 위해 편도 3시간 길을 마다하지 않은 유도 그랜드슬램의 주역 김재범 코치가 유소년 학생들과 활짝 웃는 얼굴로 뜻깊은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14일 강원도 정선 사북초등학교에서 ‘강원랜드 레전드 초청 스포츠 꿈나무 교실’이 열렸다. 재능기부를 위해 편도 3시간 길을 마다하지 않은 유도 그랜드슬램의 주역 김재범 코치가 유소년 학생들과 활짝 웃는 얼굴로 뜻깊은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한국 유도의 ‘아이콘’ 김재범 코치(32·한국마사회)가 14일 ‘레전드 초청 강원랜드 스포츠꿈나무교실’을 위해 강원도 정선 사북초등학교를 찾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은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해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아시안게임까지 한국 유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리빙 레전드’가 영하 한파를 뚫고 정선까지 편도 3시간 운전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김 코치는 유도 유소년을 위한 재능기부라는 취지를 듣자 그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즉각 수락했다. 유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면 여력이 닿는 한, 돌려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정해진 교육시간 동안 김 코치는 휴식시간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혼신을 다해 아이들과 호흡했다. 이 아이들에게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시간을 선물했다.

김재범 코치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사북초 아이들의 반응은 이랬다. “김재범 선수가 왜 여기까지 와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올림픽에서 김 코치의 현역 시절 플레이를 직접 본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도를 하는 아이들인지라 김 코치가 얼마나 유명한 유도선수인지는 잘 알았다. 송영현 군은 “유튜브로 김 코치님의 경기 장면을 찾아봤다”고 말했다. 동경하던 선수를 직접 만나는 설렘이 아이들 사이에 감돌았다.

전문 트레이너의 테이핑 교육과 스트레칭이 끝난 뒤, 오후 1시30분 김재범 코치가 입장했다. 약 50분전부터 도착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트 유도인인 김 코치가 어떻게 아이들 눈높이를 맞출지 내심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기우였다. 준비운동부터 김 코치는 재미와 체력 단련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르쳐줬다. 실제 프로 선수들이 실시하는 워밍업이었다. 이런 것을 해본 적 없었던 아이들은 힘들어도 마냥 즐거워했다.

몸을 푼 이후 기본 및 응용 기술 교육에 앞서 김 코치는 아이들 앞에서 짧은 강연을 들려줬다. 단지 유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울림을 주는 말들이었다.

김재범 코치가 진지한 자세로 사북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유도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유소년 선수 전원을 상대로 1대1 교습을 해줬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김재범 코치가 진지한 자세로 사북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유도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유소년 선수 전원을 상대로 1대1 교습을 해줬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상대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 유도야. 유도에서 상대를 메치는 것은 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야. 상대의 힘을 이용할 때, 한판승이 가능해. 절반이나 유효는 힘이 들어가도 되지만 한판승은 아니야. 세상살이도 유도랑 똑같아.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나한테 넘어오는 것이야.”

“유도를 하면 알겠지만 내 자세를 낮출수록 상대를 향한 기술이 잘 들어가. 세상이치도 그래.”

“기술이 들어갈 땐, 끝까지 걸어야 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상대가 넘어가게 돼.”

김 코치의 원 포인트 레슨을 받기 위해 방학 중임에도 사북초 유도부 남녀 유망주들이 20명 가까이 모였다. 김 코치는 단 1명도 빠뜨리지 않고, 1:1 대련을 해줬다. 신기했던 장면은 잡기를 시켜본 뒤, 곧바로 그 학생의 전국대회 수준을 족집게처럼 맞추었다. 각자의 ‘필살기’를 걸어보라고 지시한 뒤, 최상의 타이밍에서 최적 자세로 기술이 들어갔을 때에만 넘어가줬다. 감이 빠른 아이들은 기술이 잘 들어갈 때의 느낌이 무엇인지를 금방 익혔다.

김재범 코치의 말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북초등학교 유도부 유망주들의 눈망울이 빛났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김재범 코치의 말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북초등학교 유도부 유망주들의 눈망울이 빛났다. 정선|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그렇게 1시간 30분이 훌쩍 흘렀다. 김 코치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휴식시간이 없어서, 집중력이 떨어질 법도 했건만 몸의 대화는 어느새 세대와 수준을 초월한 친밀감을 줬다.

훈련을 마친 뒤 진행된 김 코치와의 대화 시간에 아이들은 “유도를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나요?”, “언제부터 유도를 잘 했나요?”와 같은 천진난만한 질문들을 던졌다. 김 코치는 “누구 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유도를 잘하면 상금만 받아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나도 중학교까지는 몸이 작고, 대회에서 입상한 기억이 없다. 고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여러분들도 그러니까 지금 못한다고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진정성을 담아서 답했다.

교습이 끝난 직후에 김재범 코치가 사북초등학교 유도부 아이들 전원을 위해 즉석 사인회를 열었다. 김 코치의 사인 한가운데 그랜드슬램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정선 | 김진환 기자 kwangshin@donga.com
교습이 끝난 직후에 김재범 코치가 사북초등학교 유도부 아이들 전원을 위해 즉석 사인회를 열었다. 김 코치의 사인 한가운데 그랜드슬램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정선 | 김진환 기자 kwangshin@donga.com

교육을 다 마친 후, 즉석 사인회가 열렸다. 김 코치는 일일이 사인지에 아이들 이름을 적어줬다. 한 아이가 기자에게 슬쩍 물었다. “그런데 사인지에 쓴 ‘그랜드슬램’이 무슨 뜻이에요?” 기자가 알려주자, 아이들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선망을 담아 김 코치 쪽을 바라봤다. 다시 먼 길을 떠나기 직전 김 코치는 “언젠가 지도자와 선수로서 다시 만나자”라고 인사했다. 사북초 유도부 아이들에게 ‘목적’이라는 것이 생긴 날이었다.

정선 |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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