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사라진 11점’ KOVO는 무엇을 잘못했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2월 16일 05시 30분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한국전력 강민웅이 대한항공과 경기 도중 유니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벌로 보이지만 두 벌을 겹쳐 입은 미등록 유니폼으로 근거 없는 11점 깎기, 경기 중단, 심판의 무지가 뒤섞인 최악의 촌극을 빚었다. 인천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한국전력 강민웅이 대한항공과 경기 도중 유니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벌로 보이지만 두 벌을 겹쳐 입은 미등록 유니폼으로 근거 없는 11점 깎기, 경기 중단, 심판의 무지가 뒤섞인 최악의 촌극을 빚었다. 인천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팩트’의 조각들이 제대로만 모이면 가치판단은 자연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1세트 한국전력의 ‘사라진 11점’을 목격하며 ‘KOVO(한국배구연맹)가 과연 V리그를 온전히 운영할 역량이 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꺼내게 된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실의 조각들을 사건 당사자들의 당일 행적과 증언, 배구 전문가들의 규정에 근거한 견해를 통해 종합했다.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NH농협 2016~2017 V리그’ 남자부 한국전력과 대한항공 경기에서 한국전력 강민웅이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민소매 유니폼을 입고 나와 경기감독관의 제지를 당하자 유니폼을 겹쳐 입고 경기에 출전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부정 선수로 간주되어 교체되고 11점 감점을 당했다. 계양 | 김종원기자 won@donga.com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NH농협 2016~2017 V리그’ 남자부 한국전력과 대한항공 경기에서 한국전력 강민웅이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민소매 유니폼을 입고 나와 경기감독관의 제지를 당하자 유니폼을 겹쳐 입고 경기에 출전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부정 선수로 간주되어 교체되고 11점 감점을 당했다. 계양 | 김종원기자 won@donga.com

● V리그가 ‘동네배구’로 전락한 과정

V리그 남자부 한국전력은 강민웅의 유니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파악했다. 박주점 경기감독관에게 유권해석을 구했고, ‘제대로 된 유니폼만 가져오면 뛸 수 있다’고 들었다. 부랴부랴 유니폼을 찾았고, 용케도 가져왔다. 그렇게 한국전력은 1세트 1-4로 뒤진 상황에서 강민웅을 교체 투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유니폼이 KOVO에 등록된 디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비슷하긴 했지만 엄연히 달랐다. 그런데 감독관과 심판진은 이를 잡아내지 못했다. 첫 번째 실수다. 오히려 상대팀 대한항공이 이를 간파했다.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이 즉시 항의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박 감독관은 묵살했다. 두 번째 실수다. 그렇게 강민웅이 ‘이상한’ 유니폼을 입은 채 경기는 14-12까지 흘러갔다. 그러다 서태원 심판위원장은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감지했다.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고 판단해 감독관석에 가 경기를 끊을 것을 요청했다. 오후 8시 정각이었다. 그리고 약 25분 간, 심판진을 총괄하는 서 심판위원장, 감독관들을 관할하는 김형실 경기운영위원장, V리그 경기운영의 실무자인 KOVO 경기운영팀장이 즉석회의를 열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였다. 그 결과 강민웅이 뛰는 동안, 한국전력이 얻은 11점을 지우고, 경기를 재개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세 번째 실수이자 가장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해프닝을 대형사고로 키운 웃지 못 할 사건이 확장되는 와중에 원칙을 제시해줄 사람은 없었다. KOVO 유니폼 규정 그 어디에도 ‘부정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뛴 상태에서 얻은 점수를 무효화한다’는 명시적 문구는 없다. KOVO도 인정한다. 그럼 도대체 무슨 근거로 KOVO는 11점을 삭제했을까? 여기서 KOVO 핵심 관계자의 고백을 빌리면, 그토록 편의적인 ‘로컬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쉽게 말해 규정이 없으니 임의대로 타협해 그 상황에 가장 욕을 덜 먹을 수습책을 꺼냈다는 얘기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동네배구를 했다’는 실토다.

여기서 드는 또 하나의 의문. 11점을 통째로 날린 한국전력은 왜 이 조치를 수용했단 말인가?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의 말이다. “KOVO가 규정이 그렇다고 하는데 도리가 없었다.” 저항하던 과정에서 신 감독은 “규정대로 하자”고 말했는데, KOVO는 “신 감독이 ‘14-1로 하자’”로 자의적 해석을 가한 것이다. 부정 유니폼과 점수 삭제가 아무 관련성이 없음을 알았다면 신 감독은 11점 삭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전력은 1세트를 8-25로 잃었고, 결국 풀세트까지 가서 패했다. 신 감독은 경기 후 KOVO 측에 비공식적으로 항의를 표시했고, 유감의 뜻을 들은 것으로 확인됐다. KOVO도 내심으로는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증거다.

2017년 2월 14일은 한국프로배구 역사에 부끄럽고 치욕적인 날로 기록될 듯하다. ‘프로’라고 자처하는 연맹은 이날 무지와 오만이라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이들이 자행한 인재는 결국 팬들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경기 도중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가운데 넥타이 맨 인물)이 한국전력 강민웅의 ‘부정유니폼’에 대해 경기감독관과 심판진에게 항의하는 장면. 인천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2017년 2월 14일은 한국프로배구 역사에 부끄럽고 치욕적인 날로 기록될 듯하다. ‘프로’라고 자처하는 연맹은 이날 무지와 오만이라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이들이 자행한 인재는 결국 팬들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1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경기 도중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가운데 넥타이 맨 인물)이 한국전력 강민웅의 ‘부정유니폼’에 대해 경기감독관과 심판진에게 항의하는 장면. 인천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KOVO

경기가 끝나고, KOVO의 네 번째 실수이자 KOVO의 정직성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변명 퍼레이드가 나온다. ‘부정 유니폼을 입은 강민웅은 부정선수이고, 그런 선수가 뛰었던 점수를 지우는 것은 정당한 조치’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주장을 편 KOVO의 핵심 관계자는 “서브 순서가 바뀐 채, 경기가 진행돼 세트가 끝난 적이 있다. 나중에 파악한 뒤, 세트 자체를 무효화한 전례가 있었다”고 말했다.

서브 순서 착오와 부정 유니폼을 동일선상에 놓고 재단하려는 논리다. 복수의 배구 관계자들은 “룰을 모르면 몰랐다고 하면 되지, 왜 저런 변명으로 순간을 모면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한다. ‘부정 유니폼을 입으면 부정선수가 되는 것이니, 그런 선수가 뛸 때 나온 점수는 모두 무효화하라’고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 V리그 운영요강 제48조에 이런 문구가 나올 뿐이다. ‘경기 당일 일부 선수가 다른 팀원들과 다른 유니폼을 착용하였을 경우, 해당 선수는 다른 팀원들과 같은 유니폼을 착용하기 전까지는 경기에 참여할 수 없고, 다른 팀원들과 같은 유니폼을 착용한 후 경기에 참여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징계는 징계 및 징계금 부과 기준에 따른다.’ 즉 강민웅에게 벌금은 물릴지언정, 한국전력의 팀 점수를 삭제할 권한은 어디에도 적시되어 있지 않다.

KOVO가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FIVB(국제배구연맹)의 로테이션 반칙은 유니폼 규정과 아무 연관성이 없다. 또 FIVB 5장 15절 9조 2항 3호의 ‘불법적 교대’는 강민웅 사례와 무관한 상황들에 관한 조항이다. 즉, 강민웅 사태에 ‘준’하는 조항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 강민웅은 부정선수가 아니다. KOVO의 무능이 부정선수로 만든 것이다. KOVO가 한국전력의 11점을 지운 것은 권한남용이다. 백번 양보해 점수를 지우려면 강민웅이 교체 투입되기 전인 4-1로 돌아가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이다. 또 강민웅이 부정선수라면 점수 지우기가 아니라 몰수게임패를 선언해야 차라리 이치에 맞다. 결과적으로 대한항공이 얻은 14점은 인정됐고, 한국전력이 얻은 11점은 무효화되며 영구보존 자료라 할 KOVO의 기록은 몽땅 왜곡이 발생했다. 전광인, 서재덕 등 강민웅 외 한국전력 선수들이 힘들여 작성한 기록도 모조리 사라졌는데, 이런 선의의 피해자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으란 말인가.

그럼에도 경기 이후까지도 “정당한 판정”이라고 주장하는 KOVO 관계자가 있다. 무능하든지, 사건을 은폐하려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강민웅이 원인을 제공했으니 그 벌칙 차원에서라도 11점을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 역시 궁색하기 짝이 없다. KOVO 감독관과 심판들이 잘 대처했으면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민웅은 퇴장 후 벌금만 물면 됐다. 나머지 한국전력 선수들의 기록까지 삭제하고, 1세트를 뺏기게 한 KOVO의 조치는 규정의 범위를 초월한 과잉벌칙이다.

‘당장의 상황만 모면하고 보자’는 KOVO의 무지, 권한남용, 부정직함 탓에 코트에서 11점을 만들려 땀 흘린 한국전력 선수들의 노력은 실종됐다. 그리고 공백의 25분 동안, 배구경기를 지켜보던 계양체육관의 팬, 시청자들의 시간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프로배구를 관할하는 KOVO의 신뢰에 대한 근본적 의문뿐이다. 배구를 가장 잘 알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배구를 주무르고 있었음이 드러났기에 이 사태는 단순 해프닝이 아니다. KOVO가 빚은 인재(人災)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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