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당사건’ 전 한화맨 김준호의 뜻 깊었던 시구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8월 25일 0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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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출신 김준호가 24일 마산 KIA-NC전을 앞두고 힘차게 시구를 하고 있다. 그는 2011년 ‘꽈당해프닝’ 으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성중학교의 체육선생님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제공 | NC 다이노스
한화 출신 김준호가 24일 마산 KIA-NC전을 앞두고 힘차게 시구를 하고 있다. 그는 2011년 ‘꽈당해프닝’ 으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성중학교의 체육선생님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제공 | NC 다이노스
24일 KIA-NC전이 열린 마산구장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전 한화맨 김준호였다. 사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프로야구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2011년 9월 23일 대전 두산-한화전 5-7로 뒤진 9회말 2사 1·2루서 이대수(현 SK)의 좌익선상 깊은 타구 때 1루에서 홈까지 전력질주하다가 홈플레이트 몇 m를 앞두고 넘어져 태그아웃됐던 ‘대주자’를 기억하는 야구팬들은 많을 것이다. 이른바 ‘꽈당사건’이라고 불리는 역대급 해프닝의 주인공이 바로 김준호였다.

김준호는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에 위치한 칠성중학교의 체육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그가 야구장을 찾은 것은 NC의 지역밀착마케팅의 일종인 ‘스쿨데이’에 칠성중학교가 초대되면서였다. 그리고 이날 시구자로 다시 그라운드 위에 섰다.

시구 전 만난 김준호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꽈당해프닝’은 자신에게도 잊지 못할 아니,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실수로 인해 팀이 진 것은 지금까지도 아쉽다. 그는 “나에게는 아픈 기억”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그때 한화가 5위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나로 인해 팀이 졌고 6위로 밀려났다. 그야말로 ‘역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김준호가 넘어진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는 2002년 LG 2차 9순위로 지명됐지만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프로에 입단한 것은 고려대를 졸업한 2007년이었다. 그러나 어깨가 좋지 않아 2011년 웨이버공시됐다. 이후 한화의 부름을 받아 프로생활을 이어갔지만 여전히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김준호는 “LG 시절부터 어깨가 좋지 않아 한화에서도 재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한대화 감독님이 ‘올해 말고 내년을 준비하자’고 하셔서 2군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순위싸움이 치열해지면서 후반기 1군에 콜업됐다”며 “그날따라 날씨가 쌀쌀했다. 그때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감독님이 대주자로 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했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몸이 덜 풀린 채로 대주자로 1루에 나갔다가 일이 터졌다. (이)대수 형이 선상 깊은 타구를 때려줘서 홈까지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3루를 도는 순간 허벅지 근육이 파열됐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뛰는 도중에 다리가 펴지지 않아서 결국 넘어졌다”고 설명했다.

김준호가 아웃되면서 그렇게 경기는 끝나고 말았다. 다리가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다리 통증보다 밀려드는 죄책감이 더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한화 팬들이었다. 김준호는 “그때 팬들 덕분에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며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다음 경기에도 다리에 테이핑을 하고 대수비로 나갔는데 팬들이 엄청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쳐주더라. 손 글씨로 쓴 응원메시지도 많이 받았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지만 그 덕분에 다시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김준호는 2011시즌을 마치고 유니폼을 벗었다. ‘꽈당사건’이 원인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 팀에서는 잔류선수로 남아달라고 했다”며 “고민이 됐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니까 프로선수로서 확실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더라. 그래서 나의 또 다른 꿈이었던 교사를 하기 위해 야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김준호는 한화를 나온 뒤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았지만 고려대에 진학한 것도 체육교육학과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한 끝에 선생님으로서 꿈을 실현시켰다. 그는 “우리 칠성중학교는 학생수가 많지 않지만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참교육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반학교지만 교육개념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수업시간에 토론을 많이 하고 체험 등을 중시한다. 오늘도 체험교육의 일환으로 야구장을 찾게 됐다. 야구선수를 그만두고 내가 야구장에서 시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감회가 새롭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프로야구선수로서의 제1막을 끝내고 교사로서 제2막을 올린 김준호의 목표는 이제 하나다. 그는 “지금도 티 배팅을 하고 프리배팅을 하고 경기하는 꿈을 꾼다”며 야구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선생님이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인생에 ‘멘토’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산 |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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