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헐크’와 미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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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본토 출신 삼성 투수 밴덴헐크, 남편보다 인기 많은 애나

‘겨울왕국’ 네덜란드에서 온 릭(왼쪽), 애나 밴덴헐크 부부에게 대구의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낯선 경험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 애쓰는 이 부부는 한국에서의 야구와 인생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 지난주 대구구장에서 아내 애나의 투구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있는 릭 밴덴헐크. 대구=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겨울왕국’ 네덜란드에서 온 릭(왼쪽), 애나 밴덴헐크 부부에게 대구의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낯선 경험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 애쓰는 이 부부는 한국에서의 야구와 인생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 지난주 대구구장에서 아내 애나의 투구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있는 릭 밴덴헐크. 대구=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겨울왕국’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태어난 남자아이 앞에 놓인 선택은 대개 두 가지다. 축구를 하거나 스피드스케이팅을 타거나.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에선 축구 선수로 뛰었고, 청소년 시절까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대회에 출전했다. “아주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좋은 선수였다”는 게 그의 말이다.

만능 운동선수였던 그가 사랑한 종목은 뜻밖에 야구였다. 네덜란드에서 야구는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야구 코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8세 때 어린이 국가대표가 됐고, 찬찬히 단계를 밟아 2007년에는 플로리다(현 마이매미)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중남미에 있는 네덜란드령 퀴라소 출신이 아닌 네덜란드 본토 출신으로 메이저리그를 밟은 몇 안 되는 선수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선수로는 유일하다. 그는 삼성의 외국인 투수 릭 밴덴헐크(29)다. 그는 막강 삼성 투수진의 핵심이다. 전반기에만 10승(2패)을 거둬 다승 2위에 올랐고, 평균자책점은 3.28로 3위다. 삼성 팬들에게 그는 없어선 안 될 선수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더욱 매력적인 공주님이 있다.

○ ‘겨울왕국’에서 온 운명적 커플

지난달 말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열린 밴덴헐크의 사인회. 주인공은 밴덴헐크였지만 팬들의 인기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은 그의 아내인 애나 밴덴헐크(23)였다.

밴덴헐크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보다 애나 앞에 늘어선 줄이 더 길었다. 부부가 함께 사인회를 여는 것도 신기했지만 선수보다 선수 아내의 인기가 더 높은 것은 더욱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애나는 삼성 팬들 사이에서 ‘승리의 여신’으로 통한다. 인형 같은 외모의 애나는 밴덴헐크가 등판할 때마다 운동장을 찾아 한국말로 “삼성, 파이팅”을 외친다. 애나는 대구 야구장에서는 이미 유명인이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팬들이 줄을 선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그는 항상 웃는 낯으로 팬들을 대해 더욱 인기가 높다.

밴덴헐크는 미남이지만 동료들은 그를 헐크라고 부른다. 애나는 지난해 히트를 쳤던 만화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다. 그래서 둘은 ‘미녀와 야수’ 커플로 불린다.

둘의 운명적 만남은 2009년에 이뤄졌다. 애나는 대학생 시절 에인트호번에서 발레를 배웠는데 그를 가르친 발레 선생님이 바로 밴덴헐크의 누나였다. 누나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4년간의 열애 끝에 지난해 결혼식을 올렸다.

한복을 입고 나란히 포즈를 취한 릭(오른쪽), 애나 밴덴헐크 부부. 이 부부는 트위터 등을 통해 한국 팬들과 수시로 소통한다. 사진 출처 애나 트위터
한복을 입고 나란히 포즈를 취한 릭(오른쪽), 애나 밴덴헐크 부부. 이 부부는 트위터 등을 통해 한국 팬들과 수시로 소통한다. 사진 출처 애나 트위터
○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의 아름다움

‘미녀와 야수’ 커플이 더욱 사랑을 받는 이유는 둘 모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화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둘은 적극적으로 팬들을 만나며 한국 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대구 시민운동장 인근 아파트에 사는 밴덴헐크는 안방 경기 때는 자전거로 운동장에 출퇴근한다. 애나 역시 자전거를 타고 슈퍼마켓을 가거나 한국말을 배우러 YMCA 등을 다닌다. 쉬는 날이면 함께 대구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방문경기 때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한국 음식을 맛보는 게 이 부부의 즐거움이다. 애나는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도시는 번화하고, 30분만 나가면 고즈넉한 시골을 즐길 수 있다. 대구 동화사와 앞산, 경주와 포항 앞바다 등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맘껏 즐기고 있다”고 했다. 밴덴헐크 역시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사인회만 해도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치러질지 몰랐다. 네덜란드였으면 서로 사인을 받으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라고 했다.

○ “한국말을 더 잘하고 싶어요”

겨울왕국에서 온 이들과 한국의 접점은 야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피드스케이팅 강국에서 온 이들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피드스케이팅 스타인 이상화와 이규혁, 이승훈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애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올해 소치 겨울올림픽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또 은퇴한 축구 스타 박지성 역시 전설적인 존재다. 밴덴헐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후 박지성이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박지성 덕분에 내 고향 팀은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지난해 그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다시 에인트호번에서 했을 때 모든 사람이 환영했다. 그는 내 마음속의 영웅”이라고 했다. 박지성이 다시 에인트호번에 입단했을 때 그는 경기장을 찾아 ‘우상’ 박지성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들이 언제까지 한국에 머물지는 알 수 없다. 성적이 안 좋으면 언제라도 짐을 싸야 하고, 반대로 너무 뛰어난 기량을 보이면 다시 메이저리그로 돌아갈 수도 있다. 밴덴헐크는 “당장의 목표는 삼성의 4연패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언제인지는 몰라도 삼성에서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투수로 뛰는 게 꿈”이라고 했다. 애나는 “어디에서건 남편 곁에서 뒷바라지하는 게 내 일”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는 한 가지 목표가 더 있다고 했다. “다음 인터뷰 때는 유창한 한국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애나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

대구=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네덜란드#릭밴덴헐크#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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