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6월 13일 개막)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지난해 6월 24일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월드컵을 준비할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그는 “이것저것 다 따지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당장은 버거울 수 있지만 시련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는 날이 있다. (월드컵 감독은) 내 앞에 온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창간 94주년 기념 인터뷰에 응한 홍 감독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23명의 전사를 이끌고 브라질 월드컵에 나설 장수인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45)은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빨리 시작됐으면 하는 생각도, 준비할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다고 한다. 선수로 네 번, 코치로 한 번, 이미 다섯 차례나 경험한 월드컵이라 그럴 수 있는 모양이다. 여섯 번째 월드컵을 앞둔 홍 감독. 그는 “월드컵을 빼고는 내 인생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 ○ “가능성 보여줄 때 있을 것”
홍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지난해 6월 이후 늘 “1차 목표는 조별리그 통과”라고 했다. “조별리그를 통과하면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덧붙일 때가 있긴 했지만 ‘8강이 목표다’고 똑 부러지게 얘기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는 이미 최소 8강에 가 있다.
“(원정으로 치른) 지난 대회 결과가 16강이었다. 이번에 더 나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게 팬들의 요구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을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라며 ‘조별리그 통과’에서 좀 더 나아간 듯한 목표를 에둘러 말했다.
○ 박주영
그는 ‘원칙을 어겼다’는 팬들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6일 그리스전을 앞두고 홍 감독은 소속 팀에서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선수는 뽑지 않겠다던 그동안의 원칙을 깨고 박주영(왓퍼드)을 선발했다. “내가 원칙을 깼다는 건 맞다. 그런데 선수(박주영)가 1부 리그에서 2부 리그 팀으로 이적까지 하면서 감독이 세운 원칙에 맞추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런 선수한테는 내가 욕을 좀 먹더라도 기회를 한 번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뽑은 박주영이 그리스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박주영이 브라질까지 같이 가는 걸로 보면 되는지 물었다. “2010년 아시아경기와 2012년 올림픽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두 번 같이 생활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박주영이 어떤 선수인지 잘 안다. 우리 팀의 문화와 철학을 잘 이해하고 동료들과의 관계가 굉장히 돈독하다.” ‘같이 간다, 안 간다’는 단정적인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박주영을 브라질에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였다.
○ 국내파, 해외파
홍 감독은 ‘국내파’ ‘해외파’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나한테는 다 중요한 선수들이다. 해외 리그 선수들만으로는 월드컵을 치를 수 없다. 또 해외에서 주전으로 뛴다고 대표팀에 뽑힌다는 보장도 없다. 내가 감독이 된 뒤로 실제로 그랬다. 어제까지 국내에서 뛰다 다음 날 해외 리그로 가는 선수도 있다. 국내파니 해외파니 하는 건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걸 이분법적으로 딱 나눠서 자꾸 얘기하니….”
“그래도 전반적인 실력 차가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은 국내에 있을 때 인정을 받았고 해외 스카우트들에게도 검증받았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문제라고 하는 건 그런(실력) 차이가 아니다. 선수들도 다 듣고 보고 하는데 밖에서 자꾸 국내파니 해외파니 하면 선수들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 “비판 두렵지 않다”
홍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뒤 14경기에서 5승 3무 6패를 했다. 이긴 것보다 패한 적이 더 많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비난이 심했을 텐데 한국 축구의 아이콘인 홍 감독이라 비교적 관대하게 넘어갔다’는 얘기가 있었다. “(비난을 받든 안 받든) 그런 건 한순간이다. 분명한 건 내가 계획한 대로 준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난받는 게 두려웠으면 시작도 안 했다. 월드컵에서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른다. 실패하면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내가 축구를 통해 쌓아놓은 것들은 그대로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표팀 감독 자리가 독이 든 성배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홍 감독의 친한 후배인 최용수 FC 서울 감독은 2년 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무조건 메달을 딸 것”이라고 했다. 최 감독은 “명보 형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운이 있다. 두고 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홍 감독이 이끈 올림픽 대표팀은 사상 첫 동메달을 땄다. 축구계 안팎에서 홍 감독은 ‘운이 좋은 사람’이란 얘기가 많이 따라다닌다. 자신이 이룬 성과가 ‘운이 좋아서’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되는 게 달가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지금의 내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것 같다. ‘정말 내가 운으로 여기까지 왔나’ 하고. 그래도 운이 좋다는 건 어쨌든 좋은 얘기 아닌가(웃음). 그런 얘기를 나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 엔트리
“1차로 예비 엔트리 30명을 골라야 한다. 아직 서너 명을 관찰 중이다. 최종 엔트리에 든 선수를 교체하더라도 이 30명 안에서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예비 엔트리라고 하지만 중요하다.” 서너 명을 보고 있다면 30명 중 90% 정도는 완성됐다는 말이다. 그는 “그동안 한 번도 안 뽑힌 선수가 지금 ‘짠’ 하고 나타나긴 어렵다. 관찰하고 있는 선수도 그동안 한 번씩은 뽑혔던 선수들이다. 지금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누구 정도는 (브라질로) 가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30명까지는 몰라도 최종 23명 중 선발 라인업 정도는 그동안 보여줬던 틀에서 변화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5월 13일까지 예비 엔트리 30명, 6월 2일까지 23명의 최종 엔트리 명단을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출해야 한다. 23명 중 부상자가 나오면 30명 안에 들었던 선수 중에서 대체자를 찾아야 한다. ▼ “생각 다르면 따지고 내 말에 토 달아라” ▼ 주변에서 말하는 ‘열린 카리스마’
영화 ‘관상’이 한창 흥행하고 있을 때 홍명보 감독의 관상풀이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눈빛이 살아 있는 호랑이상, 기개가 넘치는 강한 얼굴. 풀이는 대개 비슷했다. 홍 감독의 이름 앞에는 늘 ‘카리스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평소 좀처럼 말이 없는 홍 감독은 눈만 크게 떠도 선수들이 벌벌 떨 것 같은 그런 이미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얘기는 좀 다르다. ‘생각이 다르면 따지고 내 말에 토를 달아라.’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 시절 홍 감독이 첫 소집훈련 때 선수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김보경(카디프시티)은 이 말을 듣고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홍 감독은 경기 때 벤치에 앉는 자리도 좀 다르다. 감독들은 대개 오른쪽 맨 끝자리에 앉고 옆으로 코치들이 서열대로 앉는다. 하지만 홍 감독은 김태영 코치와 박건하 코치 사이에 끼어 앉는다. 박 코치는 “감독님은 혼자 결정하기보다 코치들과 상의를 많이 한다. 의견도 자주 묻는다. 언제 뭘 물을지 몰라 늘 긴장하고 있다. 수시로 묻기 위해 앉는 자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올림픽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했던 한 선수가 이후 어느 자리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자 안타까워했다. 선수 시절 열두 살 아래 띠동갑 후배 박지성(에인트호번)과 같은 방을 쓸 때는 박지성이 잠들 때까지 방에 들어가지 않았을 만큼 배려심이 많았다. 혹시 기가 꺾여 있을까봐 주전보다는 벤치 멤버들의 분위기를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게 홍 감독이다. 2012년 4월 박 코치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지방의 한 장례식장에서 이틀 연속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조문객이 홍 감독이라고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