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사하라 사막에서 북극까지… 그래, 나는 달리기에 미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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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오지 찾아다니며 1만km 넘게 달린 ‘트레일 러너’ 안병식 씨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을 달리는 트레일 러너 안병식 씨. 강한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다리 근육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산과 계곡, 들판, 사막을 달려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도 안 씨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을 달리는 트레일 러너 안병식 씨. 강한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다리 근육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산과 계곡, 들판, 사막을 달려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도 안 씨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다.
《 “네가 어떻게 대회를 만들어.” 먹구름으로 하늘을 온통 시커멓게 칠해놓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왜 안 된다고만 할까, 시도해 보지도 않고…. 제주의 산과 들을 마음껏 달리며 우정을 나누는 ‘트레일 러닝(trail running) 대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뜯어말린다.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경기연맹단체가 아니면 지원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첫발을 떼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처음 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
트레일 러너 안병식 씨(39). 이름 앞에 어느새 ‘세계적인’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한국인 최초의 사막 마라톤 그랜드슬램 달성, 베트남 정글 마라톤, 북극점 마라톤 우승, 호주 익스트림 레이스, 프랑스와 독일 종단 레이스. 그가 달린 거리만 1만 km가 넘는다. 세계 오지(奧地)를 다니며 극한의 레이스를 펼쳤다. 해외를 다니며 산과 계곡, 들판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이 도로를 달리는 로드 마라톤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한라산, 오름(작은 화산체), 바다를 배경으로 한 트레일 러닝 코스를 만들어 세계에 내놓을 생각이다. 새로운 도전이지만 반대에 부닥칠 때마다 사막의 밤하늘이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 2005년 10월 첫 사막 레이스

“당신 달릴 수 있겠어요?”

“아직 모르겠어요. 지금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분을 쉬고 난 후 일어났는데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코스를 표시한 작은 깃발도 보이지 않고 한낮 50도를 만들어낸 태양은 화난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렵게 걸음을 떼자 멀리서 사람들이 보였다. 몸의 방향감각이 고장 난 채 달려온 길을 거꾸로 걸어가고 있었다. 2005년 10월 이집트 사하라 사막의 한가운데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죽음의 레이스로 불리는 7일 동안의 250km 사하라 사막 마라톤. 제주 촌놈의 첫 해외여행은 이렇게 가혹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늪처럼 빠져드는 모래언덕, 너무나 그리운 물 한 모금, 심장이 터질 듯할 때 나타난 오아시스, 그리고 완주의 희열. 발톱이 3개나 빠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모랫바닥에 드러누우니 눈에 들어오는 별 가득한 사막의 밤하늘은 그간 고통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여기까지 오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 제주대 미술학과 시절 만난 마라톤 선생님

“함께 달리고 싶어.”

제주대 미술학과를 다니던 시절 술과 담배로 찌든 몸을 추슬러볼 요량으로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 한 바퀴만 달려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차올랐다. 하루를 뛰고 나면 다시 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열망만 마음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을 때 나타난 미국인 리처드 빈 켐프. 1998년 제주대 ‘5km 건강달리기 대회’에서 그는 준족(駿足)의 사나이였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함께 뛸 수 있냐고. 그는 동료이자 스승이 됐다. 차츰 거리를 늘렸고 운동장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다. 영어강사였던 리처드는 떠났지만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체중이 줄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낮과 밤을 바꿔 살았던 생활패턴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담배를 끊고 술을 자제하면서 친구들과 멀어졌지만 달리기와 자연이라는 새로운 벗이 생겼다. 마라톤 풀코스에 이어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했다. 완주의 기쁨은 자꾸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었다. 바닷물로 배를 채우고 낡은 자전거로 도전한 철인 3종 경기도 성공했다. 그러다 1년을 쉬면서 달리기의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목표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달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지워져갈 무렵 운명처럼 신문에서 사막 마라톤 기사를 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자던 꿈이 다시 깨어났다.

○ 이집트 사하라… 중국 고비… 칠레 아타카마 사막…

북극점 마라톤에 참가했을 당시 안병식 씨 얼굴. 얼굴이 온통 얼어붙어 눈사람처럼 변했다.
북극점 마라톤에 참가했을 당시 안병식 씨 얼굴. 얼굴이 온통 얼어붙어 눈사람처럼 변했다.
“사막 마라톤에 참가하다니, 대단해요. 근데 거길 왜 가요?”

무미건조한 사막에서 생고생 말고는 무슨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는 눈초리가 대부분이지만 사막을 달리는 레이스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보다 매력적이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쉼 없이 달려 나갔다. 중국 고비 사막 마라톤 250km, 칠레 아타카마 사막 마라톤 250km, (두 번째) 사하라 사막 마라톤 250km를 1년에 해치웠다. 3개 사막 마라톤대회를 완주한 사람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지는 남극 마라톤 130km를 경험했다. 고비 사막 마라톤에서는 첫 우승이라는 감격도 안았지만 순위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아타카마 사막 마라톤에서는 선수들이 서로 일으켜 세우며 달렸다. 8명이 손을 잡고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사막에서 화려한 세상을 만났다. 자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사람’을 만난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저마다 고귀한 인생의 결정체를 만들기 위해 사막을 찾은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사람의 유대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기는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그것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너와 나, 우리’라는 유대였다.

○ 머릿속엔 온통 다음 레이스 생각뿐

“난 다시 1200km를 달려야 합니다.”

“당신 미쳤어요?”

2010년 8월. 18일 동안 프랑스 1150km 종단 레이스를 마치고 나니 몸이 엉망이었다. 일주일 뒤 독일 1200km 종단 레이스가 걱정이다. 독일인 의사는 휴식을 권했지만 이미 레이스 참가신청을 마친 뒤라 되돌릴 수 없었다. 새로운 도전은 늘 설레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17일 동안 하루 평균 70km가량을 달려야 했다. 달릴 수만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무리한 레이스를 하지 않기로 했다. 1등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하루가 지나면 내일을 지탱할 힘이 어디선가 생겨났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났다.

프랑스와 독일을 한 달 넘게 달리며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비, 안개, 뜨거운 태양과 함께했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새벽 별을 바라보며 어둠을 달리던 시간들. 외로움과 슬픔의 기억들이 인생의 소중한 나침반이 됐다. 신발 5켤레가 닳아 없어졌다. 35일 동안의 달리기를 끝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다음 레이스는 어디로 갈까.’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 ‘제주 국제 트레일 러닝 대회’ 기획자로

“언제까지 달릴 건가요.”

도전이 계속될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다. 땀까지 얼어붙는 혹한의 북극 마라톤, 이상한 파리들이 피를 빨아먹으며 코와 입으로 들어왔던 아프리카 칼라하리 마라톤, 진흙을 뒤집어쓴 베트남 정글 마라톤, 알프스 산맥을 넘나든 트랜스 알파인 런, 세계의 지붕을 달린 히말라야 레이스. 그곳에서 탈진하고 부상당한 참가 선수를 끌어안고 달렸고 정글 원주민의 해맑은 눈동자를 만났다. 시골 마을의 순박한 인심에 감사했다.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에 녹아들었다.

상처와 고통 뒤에 찾아오는 행복과 희열로 몸과 마음이 뜨거웠다. 프랑스, 독일 종단 레이스를 마치고 2011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5000km를 2개월 동안 매일 달리는 횡단 레이스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그동안 한 번에 300만∼700만 원이 드는 해외 레이스 비용을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스폰서가 생겼고 다큐멘터리로 만들자는 제안도 받았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조급증이 화근이었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량을 늘리다 보니 무릎 인대에 문제가 생겼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미국 횡단이라는 오랜 꿈이 한순간 허공에 흩어졌다. 최고의 시련과 좌절이었다. 시름시름 앓았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프다. 아픈 만큼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더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꿈과 열정은 가만히 있는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또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그곳에서 한층 성숙한 자신을 만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묘한 흥분이 몸을 감쌌다.

트레일 러닝 대회 기획자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일반 참가자를 위한 10km와 프로를 위한 100km. 한라산과 오름, 들판, 해안을 달리는 코스다. 이미 머릿속에는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졌다. 제주는 세계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치명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저녁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하늘 별들과 수다를 떠는 낭만적인 대회를 만들고 싶다. 선수는 물론이고 카메라맨으로, 때론 자원봉사자로 대회에 참여했기에 자신감도 있다. 대회 일정을 확정하면 그동안 만난 세계적인 트레일 러너들에게 초청장을 띄울 생각이다.

세계를 달린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경험담을 쏟아내는 강연도 한다. 미국 횡단 레이스도 때가 되면 나설 요량이다. 한 걸음 더 내딛자 온통 새로운 세상이다.

“사막 마라톤 참가자는 회사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의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미지 세계에 도전해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습니다. 꿈은 나이와 성별, 제한된 여건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열정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열정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도전하는 이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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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러너#안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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