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 “이름은 버렸다, 죽어라 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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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7시 00분


설기현은 2011 K리그 챔피언십에서 팀 최고참답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설기현은 준PO에서 지난해까지 몸담았던 포항을 상대한다. 스포츠동아DB
설기현은 2011 K리그 챔피언십에서 팀 최고참답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설기현은 준PO에서 지난해까지 몸담았던 포항을 상대한다. 스포츠동아DB
가을잔치에 더 빛나는 큰형님 울산 설기현

준 PO 수원전서 14.57km 질주…팀내 1위
“매경기 마지막 각오” 절박함이 뛰게 만들어
후배들에게 말 대신 몸으로 보여주는 플레이

“역시! 설기현”…큰 경기서 주목 이유 있었네

올 시즌 K리그 챔피언십에서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팀은 울산 현대다. 정규리그 6위로 올라와 6강 플레이오프(PO)와 준PO에서 서울, 수원을 연파했다. 결과도 좋았지만 내용에서 더 호평을 받았다. 울산 멤버 중 가장 주목 받는 선수는 베테랑 공격수 설기현(32)이다. 사실 챔피언십 시작 때만 해도 설기현의 존재는 미미했다. 그가 올 시즌 36경기에서 올린 5골7도움은 분명 이름값에 못 미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대반전이다. 울산의 챔피언십 2경기를 본 축구 관계자들은 ‘역시 설기현’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24일 설기현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 절박함

설기현의 플레이를 보면 일단 ‘팀 내 최고참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엄청나게 뛴다. 프로연맹 데이터에 따르면 설기현은 서울과 6강PO는 11.409km(팀 내 5위), 수원과 준PO는 14.571km(팀 내 1위)를 뛰었다. 더구나 수원전에서는 무릎 부상까지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해 묻자 설기현은 “저보다 (김)신욱이가 더 많이 뛰는 것 같은데”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내가 많이 움직여야 팀플레이가 산다. 후배들 모두 죽어라 뛰는데 나 혼자만 설렁설렁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단순히 그 이유일까. “밖에서 볼 때 정말 죽기 살기로 뛰는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재차 묻자 설기현은 “지면 올 시즌 끝이다. 절박하다.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뛴다”고 답했다.

설기현은 올 시즌 내내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분명 다들 좋은 능력이 있는데 팀 성적이 나지 않아 최고참으로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챔피언십 들어 경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경기 전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선수들끼리 “오늘이 우리의 올해 마지막 저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절박함’이 화두가 되자 설기현은 10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2001년 8월, 벨기에 최고명문 안더레흐트로 이적한 설기현은 웨스트로와 슈퍼컵에서 후반 교체 출전해 20분 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깜짝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감독도 잘 모르더라. 내가 누구고 어떤 선수인지 첫 경기에서 보여줘야 한다는 절박감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때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후배들과 융화

울산 공격수 김신욱은 수원과 준PO 득점 후 “다 기현이 형 덕분이다. 기현 형 없으면 나도 없었다”고 했다. 미드필더 이호도 “기현 형의 존재감은 엄청나다”고 엄지를 들었다. 설기현의 전 소속 팀인 포항 선수들 중에서도 입버릇처럼 “설기현을 존경 한다”고 말하는 선수가 많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뛰다가 K리그에 온 지 이제 두 시즌도 채 안된 설기현을 후배들이 따르는 이유는 뭘까.

설기현은 후배들에게 특별히 말로 주문하는 게 없다. 경기직전 선수 미팅 때면 주장 곽태휘가 마지막에 “할 말 없으시냐”며 설기현에게 발언 기회를 준다. 그 때마다 그는 고개를 젓는다. 설기현은 “때론 하고 싶은 말도 있다. 하지만 말 보다는 그라운드에서 내가 먼저 플레이로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 말 안 해도 후배들이 다 안다”고 말했다.

설기현은 유럽에서 오래 프로생활을 해서인지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권위의식이 없다. 그는 영국 레딩에서 뛸 때 팀 내 골키퍼가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라며 60대 할아버지를 소개시켜주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서서히 그런 문화가 자연스러워 졌다. 친해지는 데 나이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라운드에서 여유

설기현은 올 시즌 개막 직전 갑작스레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적했다. 포항 팬들의 충격은 컸다. 올 4월 스틸야드에서 벌어진 포항-울산 전에서 포항 팬들은 설기현이 볼만 잡으면 야유를 쏟아냈다. 그러나 설기현은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포항 팬을 향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공교롭게 또 PO에서 포항을 만났고, 장소 역시 스틸야드다.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포항 팬들의 심정 십분 이해한다. 20대 때는 나도 팬들의 야유에 일희일비하며 대응할 때가 있었는데 서른 넘으니 그렇게 못 하겠다. 때론 그 혈기왕성했던 20대가 그리울 때도 있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트위터@Bergkamp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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