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The Fan] 응원 팀은 달라도 팬심은 하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1년 1월 7일 07시 00분


2010년 8월 26일. 넥센 강귀태의 솔로 홈런 한방으로 한화 류현진의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기록이 멈췄다. 류현진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었고, 한화팬들은 뒷목을 부여잡았으며, 모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있던 나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강단에 주저앉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뭐 그렇게까지 상심했던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류현진은 2010년 이글스의 자존심이었으니까.

다음날 아침, 밀려오는 허탈감에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을 부산에 사는 롯데팬이라고 소개하더니 진한 부산 사투리로 다짜고짜 따지신다. “아, 거 좀 똑바로 하라 하이소!” 들어보니, 며칠 전 사직에서 벌어진 사건 이야기다.

KIA 투수 윤석민이 던진 공이 롯데 타자 조성환의 머리에 맞았고, 하필 또 윤석민, 하필 또 조성환, 하필 또 머리라는 우연의 3박자에 격노한 사직의 팬들이 그라운드에 물병을 투척했단다. 따지고 보면 롯데팬들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각종 매체들이 롯데팬의 관중 매너를 문제 삼아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니 시정해 달라는 얘기였다.

맞는 말씀이고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나, 우리 기관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주소를 잘못 찾은 민원.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기에 그 분은 너무 흥분했고, 무엇보다 내 심사가 정상이 아니었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전봇대만 한데 누구를 위로하고 설득할 수 있으랴.

“저기, 전 한화 이글스 팬인데요. 어제 류현진의 퀄리티스타트 기록이 깨졌어요. 심지어 우린 꼴찐데. 그러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는 덜 속상하시잖아요….” 세상에, 민원인에게 이런 답변을! 심지어 울먹거리기까지! 큰일이다. 내가 왜 이러나 싶은 그 순간. 놀랍게도 조용해진 수화기 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한화 팬입니꺼. 저도 어제 그거 봤는데예, 글마 잘 떤지드마 거서 고마 홈런을 쌔리 맞아가…. 보는 내가 억장이 디비지더라꼬예. 그러이 한화 팬들은 속이 속이 아니겠지예. 우리도 그 마음 압니더. 꼴찌 억수로 많이 해봤다 아입니꺼. 와 모리겠는교. 그래도 루헨지니 글마는 진짜 최곱니더. 직인다 아인교. 그러이 힘 내시소. 좋은날 오겠지예.”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멍했고 곧이어 민망함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업무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다니, 도리어 민원인으로부터 위로를 받다니. 나도 나지만, 그분도 참 어지간하다. 그런데 그 분은 왜 갑자기 흥분을 멈추고 날 위로하셨을까. 내 목소리가 그리도 절절하고 불쌍했단 말인가….

아마도 그 분은 딱히 어떤 해결 방법을 바란 게 아니라, 너무 분통이 터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던 듯 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같은 야구팬이 “그래도 댁은 나보다 낫지 않느냐”고 말하니, 야구팬끼리의 ‘동지 의식’으로 ‘그래. 내 맘 네가 알고, 네 맘 내가 알지’ 싶어 홀연히 화가 풀리신 게 아닐지. 비록 팀은 각각이어도 야구팬의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을 난데없이 느낀 그날 아침.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때 언론중재위원회로 전화 주셨던 부산의 어느 롯데팬 분. 참으로 감사했으며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지면을 빌어 전한다.
구율화 변호사

야구선수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에 관심이 많다. 야구계 변방에서 꾸준히 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스포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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