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잡은 라켓, 놓기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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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3일 07시 00분


태극마크 12년만에 첫 AG 메달…스쿼시 맏언니 “자랑스런 후배들과 더 뛰고 싶어요”

직접 경기에 뛸 때보다 더 초조하다. 한국 스쿼시의 대들보 박은옥이 일본과의 단체전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후배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광저우(중국)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직접 경기에 뛸 때보다 더 초조하다. 한국 스쿼시의 대들보 박은옥이 일본과의 단체전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후배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광저우(중국)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우리에겐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이에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행복하죠. 후배들이 자랑스럽고요.” 22일 광저우 아시안게임타운 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일본의 스쿼시 여자단체전 A조 조별리그 첫 경기. 세 시간 넘는 접전 끝에 마지막 3경기에 나선 김가혜(29·전남체육회)가 세트스코어 3-2 승리를 거둬 한국의 2-1 짜릿한 역전승이 확정되자, 2경기에 나서 이겼던 대표팀 최고참 박은옥(33·경기도체육회)은 막내 송선미(20·한국체대)와 얼싸 안으며 마치 우승이나 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최강 말레이시아와의 조별리그 나머지경기에서 패하더라도 최소한 동메달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도전만에 맞이한 ‘특별한 AG’

아시안게임에 첫 출전한 것은 1998년 방콕대회였다. 당시 시범종목이었고, 물론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첫 정식종목이 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도,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때도 마찬가지. 태극마크를 단지 12년만인 이번 광저우아시안게임. 개인전에선 또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이번에 도입된 단체전에서 띠동갑 아래 후배들과 함께 한국 스쿼시 사상 아시안게임 첫 메달을 확보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스쿼시로 전향하며 꽃핀 인생

열 살 때이던 초등학교 3학년 겨울, 처음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다. 벌써 라켓과 함께 지낸지 24년. “(이)용대가 내 화순고등학교 후배”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녀는 “배드민턴을 하면서 잘 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동강대 2학년 때까지 전국체전에 선수로 출전했지만 전국대회 입상 경력은 전무. 이 때 우연치 않게 스쿼시를 접했고, 뒤늦게 종목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삼육대 3학년에 편입하면서 스쿼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배드민턴에서 꽃피지 못했던 그녀는 전향 첫해였던 1998년, 태극마크를 달면서 곧바로 국내무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박은옥이 단체전 2번 단식 주자로 나서 일본 선수와 대결을 펼치고 있다. 광저우(중국)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박은옥이 단체전 2번 단식 주자로 나서 일본 선수와 대결을 펼치고 있다. 광저우(중국)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아르바이트로 돈 벌며 출전한 세계 투어

“배드민턴이나 탁구, 테니스 같은 라켓종목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게임을 하지만, 스쿼시는 같은 공간 안에서 상대와 싸운다는 압박감이 크다”는 게 그녀가 스쿼시에 느끼는 매력. 물론 자신이 배드민턴 선수 출신이라는 게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스쿼시는 국내 등록 선수가 100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저변이 넓지 않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프로 투어가 진행되는 인기 종목 중 하나. 경기도에 몸담기 전, 그녀는 ‘무적 선수’일 때도 6개월 정도 개인 레슨이나 피트니스클럽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 뒤 홀로 세계 투어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때 세계랭킹 58위까지 올라갔지만 최근 1,2년간 출전을 못하면서 올 순위는 125등 정도다.

○박사과정의 학구파

대표팀 막내 송선미와는 무려 13살차. 남자대표팀에도 그보다 나이 많은 선수는 없다. 대표팀 구윤회(37·대한스쿼시연맹) 감독과도 단 4살차밖에 나지 않는다. 주변으로부터 ‘은퇴할 때가 된 게 아니냐’는 질문도, ‘평생 라켓하고 살 거냐. 결혼도 해야하지 않느냐’는 농담도 듣는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라켓을 놓을 생각도, 코트를 떠날 생각도 없다. “한 때 은퇴해 코치 길을 걸을지도 고민했지만, 스쿼시 저변이 넓지 않아 (나를 치고) 올라올 후배들이 별로 없다. 함께 뛰면서 배우고 가르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는 현재 경희대 레저스포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학구파다. 낮에는 운동하고, 밤에는 책과 씨름하는 그녀는 “다음 학기에 논문을 써야하는데, 운동을 소홀히 하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라켓 들고 화보 찍고 싶다

스쿼시가 진행되는 아시안게임타운 체육관에서는 당구 경기도 열렸다. 그녀에게 ‘스쿼시 선수로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묻자,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화보를 꼭 한번 찍고 싶다”고 했다. “꼭 얼굴 예쁜 차유람만 큐 들고 화보 찍으란 법이 있느냐. 스쿼시 인기도 높일 겸, 기회 닿으면 라켓 들고 화보를 찍고 싶다”고 했다. “24년 동안 라켓을 들고 살았는데 누가 안 해주면, 내 돈을 들여서 개인 소장용이라도 한번 꼭 해보고 싶은 꿈”이란다. 그건 곧 스쿼시에 대한 사랑이다.

광저우(중국)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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