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없다… 포기도 없다… ‘야구’만 있다

  • 입력 2009년 5월 12일 02시 58분


선수 25명의 미니팀 경찰 야구단이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비록 2군 리그지만 선수들이 흘리는 땀만큼은 1군 못지않다. 경찰 야구단 선수들이 유승안 감독(가운데)을 중심으로 포즈를 취했다. 구리=이훈구 기자
선수 25명의 미니팀 경찰 야구단이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비록 2군 리그지만 선수들이 흘리는 땀만큼은 1군 못지않다. 경찰 야구단 선수들이 유승안 감독(가운데)을 중심으로 포즈를 취했다. 구리=이훈구 기자
경찰 야구단 한승엽이 7일 LG 2군과의 경기에서 스피드건을 사용해 투구 분석을 하고 있다. 구리=이훈구 기자
경찰 야구단 한승엽이 7일 LG 2군과의 경기에서 스피드건을 사용해 투구 분석을 하고 있다. 구리=이훈구 기자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라. 올해 꼴찌를 했지만 못한 게 아니라 여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년이 너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명심해라.” 유승안 감독(53)은 선수들을 둘러봤다. 지난해 11월 첫날이었다. 현역 시절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프로야구 한화 감독을 지냈던 그의 눈에 경찰 야구단 선수들이 흡족할 리 없었다. ‘무섭다고 소문났던데….’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수도 눈에 띄었다. 경찰 야구단 오른손 투수 한승엽(24)은 새 감독과 눈을 마주치기를 두려워했다. 제물포고를 졸업한 뒤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해 대학에 갔고 지난해 2군 리그에서 1승 5패에 평균자책 9.30에 그쳤던 그로서는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이 멀게만 느껴졌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 눈 밖에만 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2군리그 돌풍 일으키는 경찰야구단

전체 선수라야 달랑 25명뿐

타자가 투수도 해야하는 상황

13명은 1군무대 경험조차 없다

만년 꼴찌… 이를 악물었다

승수가 쌓이더니 어느덧 2위로

그들, 이제는 더 큰 꿈을 꾼다

○ “오늘 지면 외박은 없다”

2005년 창단한 경찰 야구단은 만년 하위 팀이다. 2006년 첫 시즌에 2군 북부리그 6개 팀 가운데 5위, 지난해에는 꼴찌였다. 6개월에 걸친 장기 레이스를 펼치기에 25명은 너무 적었다. 게다가 선수들은 모두가 동기다. 창단 멤버 25명은 고스란히 2007년 말 전역했다. 올 시즌 뛰고 있는 2기 멤버들은 지난해 3월에야 팀을 구성했다. 손발을 맞추지 못한 선수들에게 개막전은 연습경기나 다름없었다.

5월의 한낮은 뜨거웠다. 경기 구리시에 있는 LG의 2군 홈구장 챔피언스클럽에 모인 선수들은 얼굴에 선크림을 잔뜩 발랐다. 한 시즌 89경기 모두를 낮에만 하는 2군 선수들에게 선크림은 필수품이다. 경찰은 7일 LG 2군과 대결했다. 3연전 가운데 마지막 경기. 전날까지 성적은 1승 1패였다.

“오늘 이겨야 외박을 나갈 수 있는데….” 경기를 지켜보던 한승엽이 말했다. 그는 글러브와 야구공 대신 스피드건과 볼펜을 들고 있다. 양 팀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구속과 구종, 그리고 타구 방향 등을 열심히 기록했다. 2군은 기록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선수들이 돌아가며 기록을 한다. 지난달 중순 연습을 하다 허벅지를 다쳐 당분간은 등판할 수 없는 한승엽은 일주일째 기록만 하고 있다. 유 감독은 부임 후에 주간 승률이 50%가 넘으면 1박 2일 외박을 주기로 했다. 3연전의 경우 2승을 거두면 하룻밤이나마 집에 갈 수 있다.

“처음에는 감독님이 무섭기만 했는데 훈련을 거듭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경찰 야구단은 11일 현재 2위에 올라 있다. 지난달 하순까지만 해도 선두를 달렸다. 올해는 새로 팀을 꾸릴 필요가 없었던 까닭에 지난해 말부터 부산∼제주∼부산∼대전을 오가며 마무리 훈련과 연습 경기를 한 덕분이다. 창단 후 처음으로 대만 전지훈련까지 계획했다 치솟은 환율 때문에 애꿎은 예약금만 날렸지만 선수들은 모처럼 훈련다운 훈련을 했다.

○ 라이벌보다 무서운 적은 더위

“5월이 지나면 쉽지 않아. 오늘 꼭 이겨야 돼.”

유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투수 전원 대기령을 내렸다. 어차피 몇 명 안 되지만 선발, 마무리 구분 없이 등판을 시키겠다고 공언한 것. 삼성에서 뛰던 조영훈(27)은 4번 타자를 맡아 리그 홈런 선두(9개)지만 올 시즌 5경기에 투수로도 나섰다. 팀에 왼손 투수가 없기 때문에 급할 때면 왼손 타자를 상대로 왼손을 쓰는 그가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섰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한 구단 등록 선수는 총 63명. 이 가운데 1군 엔트리는 26명이다. 나머지는 2군으로 내려간다. 이 숫자만 해도 36∼37명이다. 신고 선수는 등록 선수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날 경기에 나설 수 있는 LG 선수는 신고 선수 17명까지 포함해 50명이 넘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리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선수 인생이 망가진다.”

경찰 야구단 선수 25명 가운데 13명은 1군 경험이 없다. 이 중 11명은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지난해 프로야구 2차 지명 대상자는 750명. 그 가운데 프로에 입단한 선수는 65명으로 취업률은 8.7%에 불과하다.

“전·의경 제도 폐지로 경찰 야구단이 2012년 없어진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팀이 없어지면 병역을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젊은 선수들의 기회가 반으로 줄어든다.”

유 감독의 소원은 군 라이벌 상무(34명)만큼 선수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해 상무와 12번 만나 1승 1무 10패에 그쳤던 경찰은 올해 3차례 대결에서 이미 1승(2패)을 거뒀다. 그는 올 시즌을 계기로 경찰과 상무가 진정한 라이벌이 되기를 기대했다.

○ 물러설 곳 없는 선수들

“팀에 입단한 것만 해도 행운이죠. 하지만 전역 뒤 프로에서 뽑아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한승엽은 원광대 4학년이던 2007년 10월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1차 테스트에서는 탈락했고 2차에서 붙었다. 44명의 투수가 응시해 11명이 경찰 유니폼을 입었다. 야구를 하며 병역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기쁨도 잠시. 한승엽은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왜 힘든 운동을 하느냐고 하셨죠. 어릴 때부터 야구하는 걸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지금은 장성한 아들이 1군 무대에서 꿈을 펼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승엽 같은 아마추어 출신 선수가 병역을 미치고 프로팀의 러브 콜을 받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동계훈련을 열심히 해 기대가 컸는데 이렇게 기록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요. 6월부터 경기에 나간다고 해도 넉 달 정도밖에 던질 기회가 없네요. 죽을힘을 다해봐야죠.”

이날 9회초까지 6-4로 앞섰던 경찰은 9회말 2점을 내주고 동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1군과 마찬가지로 2군도 무승부는 패배로 계산한다. 아쉽게 비겼지만 유 감독은 냉정했다. 외박을 눈앞에 뒀던 선수단은 짐을 꾸려 벽제 숙소로 돌아갔다.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동안 열심히 안 했다면 그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찰 야구단은 올 시즌을 마치면 다시 새롭게 팀을 꾸려야 한다. 어렵게 만들어낸 돌풍은 더위와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선수들의 표정은 절박해 보였다.

구리=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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