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내 인생 전부인 야구…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 입력 2008년 7월 5일 08시 35분


‘2000년 타격왕, 골든글러브 3회 수상, 39연속경기안타 아시아 신기록….’

한국프로야구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내야수 박종호(35)가 야구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 삼성은 3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웨이버 공시를 신청했다. 사실상 방출이다. 7일 이내에 다른 구단에서 영입하면 선수생명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 기한을 넘기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은퇴를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웨이버 공시 하루 뒤인 4일 대구구장 바로 뒤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박종호를 인근 커피숍에서 만나 솔직한 심정을 들어봤다.

○방출통보, 그리고 잠못 이룬 밤

방출. 프로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선수가 방출되는 장면을 보면 심정적으로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남의 일’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어떨까.

“어제(3일) 경산에서 훈련 끝나고 집에 가는데 운영팀 박덕주 과장한테 전화가 왔더라고요. 웬일이냐고 물었죠. ‘안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하셔서 순간 트레이드인가 싶었는데 웨이버 공시라고 하시더라고요. 당황했죠. 막상 나의 현실이 되니까. 밤에 잠을 잘 때까지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벌써 나도 그렇게 됐구나.”

○3번째 보따리를 싸는 심정

4일 삼성의 2군 숙소인 경산볼파크에 가서 옷가지며 짐을 챙겼다. 소속팀이 바뀌면서 보따리를 싸기는 이번이 세번째. 92년 성남고를 졸업한 뒤 LG에 입단한 그는 98년 7월 현대로 트레이드됐고, 2003년 말 프리에이전트(FA)로 삼성과 4년간 22억원에 계약하며 두 번째 짐을 쌌다. “현대로 이적할 때는 처음 겪는 트레이드라 앞이 깜깜했고, 삼성으로 옮길 때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팀인 데다 내가 원했던 이적이라 담담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좀…. 짐을 싸면서도 멍하더라고요. 나를 불러주는 팀이 있을까. 이대로 유니폼을 벗는 것은 아닐까.”

○아들 “아빠 삼성에 남아” 가슴 찢어져

3일 밤 동갑내기 아내 조선희(35)씨에게는 웨이버 공시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차마 애들한테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들 규건(6)과 딸 나현(5)을 두고 있다. 규건은 이제 아빠가 야구선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야구선수가 꿈이다. 아빠처럼 스위치히터가 되기 위해 왼손과 오른손으로 방망이를 휘두른다.

박종호는 아들에게 “아빠가 만약 다른 팀 가면 어떻게 해?”라고 슬며시 물었다. 아들은 “삼성에 계속 남아있어”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아빠의 마음은 찢어졌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행복했던 삼성, 고마운 대구

대구에 온 지 5년. 어릴 때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할 정도로 삼성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였다. 그래서 떠나지만 후회는 없다.

“어릴 때 이만수 아저씨, 류중일 아저씨 보면서 삼성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FA 때 삼성에서 러브콜이 왔을 때 너무나 기뻤죠. 여기 와서 우승도 두 번 해보고, 좋은 지도자와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어요. 대구가 참 살기 좋더라고요. 아내와 가족들도 모두 좋아하는 곳이에요. 대구에서 팬들한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마지막 모습은 안 좋게 떠나지만 대구사람들한테 고맙죠.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나만 여길 떠나고, 식구들은 대구에 남을 거예요.”

○초조하게 기다리는 휴대폰 벨소리

웨이버 공시 통보를 받은 뒤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고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혹시 자신을 찾는 팀이 아닐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휴대폰 액정을 쳐다본다. 4일까지는 아쉽게도 그를 불러주는 구단이 없었다. 그저 친한 선수들과 지인들이 걱정하고 격려해주는 전화일 뿐.

“프로야구는 비즈니스 아닙니까. 실력 없는 선수는 내보내는 것이 당연하죠. 냉정하니까.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죠. 야구가 변하는데 내가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내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야구인생의 마지막 스위치를 꿈꾸며

10일까지 어느 구단도 그를 영입하지 않으면 규약상 그는 올 시즌 어느 팀과도 계약할 수 없다. 내년을 기약해야 하지만 1주일 내에 연락이 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난 야구밖에 모르니까 그게 더 문제인 것 같아요. 야구가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지도 못했으니까. 아마 내 인생에서 야구를 잃어버린다면 패닉상태가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때(은퇴)가 아니길 바랄 뿐이죠. 선수생활 연장이냐, 은퇴냐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는데 포기하지는 않을래요. 연락이 오지 않더라도 올 겨울까지 준비는 하고 있을 거예요.”

선수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스위치히터 박종호. 그는 야구인생의 극적인 마지막 스위치를 꿈꾸고 있다. 아들에게 자랑스런 ‘야구선수 박종호’의 모습을 보인 뒤 유니폼을 벗겠다며.

대구 |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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