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2월12일 13일째 초속 7m, 8m, 9m, 12m…

  • 입력 2003년 12월 16일 15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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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 속의 운행
블리자드 속의 운행
날씨 : 맑음

기온 : 영하 17도

풍속 : 초속 12m-블리자드

운행시간 : 07:50 - 17:00(09시간10분)

운행거리 : 19.2km (누계 :205.9km) /남극까지 남은 거리:928.8km

야영위치 : 남위 81도 41분026초 / 서경 80도 43분546초

고도 : 874m

오늘로 운행거리 누계가 200km를 넘어섰다.

어제의 바람이 아침에도 계속된다. 초속 7-8m의 바람에 영하 17도의 기온은 그리 부담스러운 날씨는 아니다. 텐트를 걷다가 '뭔가' 바람에 날리면 빨리 뛰지 않으면 그 '뭔가'를 잃게 된다. 오늘아침 은박매트가 날아 갔다. 날기 시작한 순간 박대장의 일갈외침 "저거 날라 간다아~" 순간 막내 이현조 대원이 뛰기 시작한다. 역시 막내답다. 대원 중에 뜀박질은 이현조 대원이 으뜸이다. 잡힐 듯하다가 날아가고 잡힐 듯하다가 날아간다. 전력질주 끝에 70m를 달리다가 결국 은박매트를 잡아챈다. 블리자드 상황에서라면 잡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텐트 플라이라도 날아갔다고 한다면 탐험을 중단해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장갑을 놓쳤다면 동상에 노출되는 것이고 밥그릇이 날아갔다면 식사에 곤란을 겪으리라. 텐트 주변에 놓아 둔 장비며 물건들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짐을 썰매에 꾸리고 나자 비로소 안심이다. 그리 센 바람도 아닌데....

어제 올랐던 남은 언덕을 계속 오른다. 다행히 곧 경사는 누그러졌고 보기에도 평평한 설원으로 접어든다. 설원의 상태가 좋은 편이다. 속도가 붙는다. 두 시간여 썰매를 잘 끌고 가는데 앞에 다시 언덕이다. 바람은 점점 세게 불어온다. 언덕길을 오르며 뒤 돌아본다. 지나온 설원은 분명 아래에 있었다. 박대장 한마디. "이건 계단식 논을 오르는 기분이군".

평평한 설원을 지나면 언덕을 오르고, 언덕을 다 오르고 나면 평평한 설원을 지나고, 다시 언덕을 오르고, 계속 이런 식이니 박대장의 말이 그럴 듯 하다. 언덕을 거의 올라서자 설원 먼 곳에서 뿌연 연기같은 것이 밀려온다. 블리자드에 날리는 눈가루다. 아침부터 바람은 점점 세지더니 결국 블리자드로 바뀐 것이다. 초속 7m, 8m, 9m, 12m… 블리자드.

남극은 블리자드를 보내 탐험대의 접근을 막아본다. 온몸으로 와 닿는 바람의 기세에 대원들의 발걸음이 더뎌진다. 그나마 평지를 지날 때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돌파를 해낸다. 다시 언덕을 오른다. 블리자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탐험대의 위기다. 썰매를 멈추고 몸을 돌려 바람을 피해본다. 블리자드가 봐줄리 없다. 따뜻한 음료와 간식으로 재정비한 탐험대는 다시 블리자드와 맞선다. 힘겨운 투쟁. 촬영을 하던 이치상 대원은 본대와 100m 이상 떨어진 채 운행을 하며 따라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오후 3시 간식시간에 박대장은 이런 바람 속에 무리한 운행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오후 6시에 운행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바람 속으로 나선다. 간식을 먹었다고 상황이 더 좋아질리 없다. 휴식 뒤에는 잠깐 운행속도가 좋아지지만 곧 바람의 저항에 고전한다. 블리자드는 자신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언덕길에서 결국 탐험대가 정한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운행을 중단한다. 일단은 판정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기 레이스에서 무리수는 금물이다. 이보 전진을 위해 오늘하루 한 시간의 운행시간 단축 처방을 내린 것이다. 일찍 운행을 마치자 텐트 안에서는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mp3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고 오징어도 구어 먹는다. 운행 중에 먹지 못한 간식을 먹어 치운다. 느긋하다. 대화의 주제는 먹는 것이다. 이현조 대원은 '빙어'를 꺼내 놓는다.

"빙어처럼 멸치도 회로 먹으면 맛있나요?"

"말해 뭐 하겠냐". 박대장이 쩝 입맛을 다시며 대꾸한다.

탐험 초반 먹는 얘기가 없더니 이삼일 전부터 자연스럽게 대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단연 불광동의 연포탕과 잘 발효시킨 구기자술이 으뜸이다. 시작되면 끝이 없는 '먹는 얘기'는 탐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끝이 날 것이다. 얘기가 아닌 현실이 빨리 오기만을 고대하는 탐험대원들 앞에 놓인 길의 끝은 분명 정해져 있다.

내일부터는 출발시간이 30분 앞당겨졌고 이에따라 기상시간은 한 시간 앞당겨졌다.

기인지우(杞人之憂)말고 기호지세(騎虎之勢)로세!

***杞人之憂:앞으로의 일에 이것저것 쓸데없이 걱정 함.

***騎虎之勢: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 즉 중도에 그만 둘 수 없는 형세를 말함.

남극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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