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마라톤]"봉주 표정이 왠지 이상했슈"

  • 입력 2000년 10월 1일 18시 44분


“오늘 출발하는 봉주 표정이 왠지 이상했슈. 30년 키운 아비의 예감이랄까유.”

1일 시드니 올림픽 남자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이 기대됐던 이봉주선수(30)가 부진한 성적을 보이자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TV를 지켜보던 아버지 이해구(李海九·71·충남 천안시 성거읍 소우리)씨의 주름진 얼굴에 약간의 경련이 일어났다.

▼줄담배 피며 TV지켜봐▼

건강악화로 지난달 28일 부인 공옥희(孔玉熙·65)씨, 큰아들 성주(成柱·41)씨와 함께시드니로 가지 못한 이씨는 경기 내내 술잔과 담배를 입에서 떼지 못했다.

이씨는 경기시작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들이 선두권에 끼어들지 못하자 소주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다시 TV 앞에 섰으나 20위권 밖에서 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예 마당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봉주가 왜 안보이는 겨.”

이선수의 동네 선배인 고재학(高在學·35)씨가 고함을 치자 이씨는 “잔소리 말어. 끝까지 지켜봐야 되는겨”라며 맞고함 쳤다.

그러나 1시간 50분이 지나고 이선수가 ‘승부를 걸겠다’던 35㎞ 지점에서도 이선수가 앞서 나오지 못하자 아버지 이씨의 얼굴에는 짙은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이선수의 누나 경숙(慶淑·33)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봉주가 컨디션이 안좋았던 모양이에요. 다음에 잘 하면 되잖아요”라며 위로했다.

▼주민들도 아쉬움에 허탈▼

마을 회관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TV를 지켜보던 마을 주민 50여명은 더욱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이선수가 24위로 올림픽 스타디움에 모습을 나타내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선수의 조카 최보람양(11·초등학교4년)은 소리 없이 마을회관을 나와 소각장 담벼락에 분필로 ‘봉주 삼촌, 걱정마세요’라고 쓰면서 눈물을 훔쳐냈다.

이선수 집의 마루와 마을회관 앞 마당에는 이선수의 승전보에 맞춰 잔치를 벌이려고 준비했던 돼지고기와 막걸리 장구 북 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천안〓이기진기자>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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