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노인 통장-도장 내밀자…신분증 확인도 없이 150만원 내줬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24일 21시 56분


은행들 노인계좌 관리 허술
예금주와 관계도 묻지 않아
노인 동행땐 통장개설도 가능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화면에 ‘백오십만 원’이라고 적어주세요.”

23일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구의 한 은행 창구. 기자가 치매 노인 박선자(92·가명) 씨의 통장과 도장을 내밀고 현금 인출을 요청하자 직원이 이같이 답했다. 디지털 패드에 박 씨의 이름을 적자 띠지로 묶인 현금 뭉치가 곧장 기자의 손에 쥐어졌다. 신분증이 필요 없느냐고 묻자 직원은 “(예금주의) 도장이 있으니 괜찮다”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치매 노인과 무관한 제3자가 타인의 자산을 탈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분 40초였다.

취재팀은 22, 23일 이틀간 치매 노인 가족의 동의를 받아 서울과 경기의 은행 5곳에서 ‘미스터리 쇼핑’을 진행했다. 대상은 2022년 치매 진단과 함께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박 씨의 통장이었다. 그 결과 5곳 모두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172조 원에 달하는 ‘치매 머니’를 노린 사냥이 잇따르지만, 정작 최전방인 은행 창구는 허술한 본인 확인 절차 앞에 뻥 뚫려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분 만에 뚫린 은행… “ATM 쓰세요” 안내까지

예금주와 동행하지 않고도 돈을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통장과 도장을 내고, 은행 직원에게 현금을 뽑아 달라고 요구한다. 이후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비밀번호와 이름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예금주와의 관계를 묻거나 신분증을 요구한 은행은 한 곳도 없었다.

오히려 창구 인출보다 쉬운 방법을 안내하는 곳도 있었다. 경기 수원시에 있는 한 은행 지점 직원은 “대기 시간이 길어 죄송하다”며 “현금인출기(ATM)를 이용하면 바로 현금을 뽑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 씨 명의로 통장을 새로 개설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가능하지만, 노인이 직접 와야 한다”면서도 “모시고 와서, 확인이라 대답만 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인지 능력이 무너진 노인을 은행에 앉혀 놓기만 하면 사냥꾼이 마음대로 계좌를 주무를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치매 환자였던 고 강대용 씨(73)의 ‘고향 친구’도 지난해 3월 이런 식으로 강 씨 명의 통장을 만들어 재산을 가로챘다.

박 씨도 이처럼 허술한 은행의 현금 인출 시스템으로 인해 조카에게 돈을 뺏긴 피해자다. 치매 진단을 받은 2022년부터 조카인 김모 씨가 박 씨의 통장을 관리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수십만 원대 현금을 뽑아 사용했다. 나중에는 박 씨를 직접 은행 창구로 데려가 3000만 원의 예금을 한꺼번에 인출하기도 했다. 박 씨의 며느리 윤모 씨(56)는 “은행에서 이렇게 쉽게 돈을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라며 “우리 어머님 같은 치매 노인에 대해선 보호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현장에서 작동 않는 범죄 예방책

은행권이 범죄 방어 체계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사냥’을 막는 데 큰돈을 쓰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8개 주요 은행의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통해 이체 보류 등 임시 조치를 한 사례는 최근 3년간 21만1380건에 달했다. 지난해 의심거래보고(STR) 건수도 108만 건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런 감시망은 ‘창구의 도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은행이 인공지능(AI)을 동원해 비대면 이체를 실시간 감시하는 동안, 정작 대면 창구에 나타난 사냥꾼은 낡은 약관의 비호를 받으며 유유히 현금을 챙겼다. 예금거래기본약관상 도장과 비밀번호가 일치하면 은행의 책임은 면제되기 때문이다.

은행연합회와 금감원은 2023년 4월 치매 환자처럼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은행을 방문하지 않고도 치료비 등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했다. 예금주의 가족이 치료비 목적으로 통장에서 돈을 인출할 땐 위임장이나 인감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가족이 아닌 제3자에게는 위임장 등을 요구하기로 했는데, 취재팀이 둘러본 은행 5곳에서 이 절차를 지킨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인감도장이 있으면 위임장 없이도 돈을 내주는 관행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치매 노인의 자산을 노리는 사냥꾼 대다수는 피해자의 곁을 지키며 언제든 통장과 도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이들이다. 실제 노인보호전문기관이 2020년부터 5년간 조사한 치매 노인 대상 경제적 학대 판정서 379건을 분석한 결과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아들딸 등 가족(52.0%)이었다. 요양원·요양병원 등 시설 종사자(31.9%)와 이웃 등 지인(11.9%)이 그 뒤를 이었다. 379건 중 126건은 치매 노인의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연금 등을 몰래 빼돌리는 ‘기생형’이었다. 하지만 은행의 허술한 현금 인출 구조로 인해 이를 막지 못하는 셈이다.

“치매 진단 정보 공유하고, 특별 확인 절차 둬야”

전문가들은 치매 노인의 자산권을 지키기 위해선 의료와 금융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등급 판정을 받고 장기요양인정서가 나온 치매 환자라면 해당 은행이 해당 정보를 공유받고 계좌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제3자가 대신 예금을 찾을 때 인감이 있어도 대리인 위임장 등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치매가 의심되는 고령층에겐 특별한 확인 절차를 둬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이연지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선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연락처를 은행에서 미리 파악한다”며 “고령층 등에서 의심 거래가 발생할 때 이 연락처를 통해 통장 주인과의 관계를 확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이 같은 확인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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