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신비로운 크리스마스 밤[김민의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황소가 있는 성탄 풍경

폴 고갱의 말년 작품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밤(황소들의 축복·1902∼1903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소장품.
폴 고갱의 말년 작품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밤(황소들의 축복·1902∼1903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소장품.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흰 눈이 두껍게 쌓인 오두막이 굽이굽이 펼쳐진 어느 시골 마을. 멀리 하늘에선 오렌지색 노을이 보입니다. 회색이 감도는 흰 눈과 차가운 겨울밤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을 제외하면, 이 그림에서 빛나는 건 석양과 여성들의 주홍빛 얼굴뿐입니다.

반짝이는 전구로 가득한 트리와 선명하고 화려한 발광다이오드(LED) 그래픽이 행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요즘 크리스마스 풍경을 생각하면,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이 그린 이 ‘크리스마스 밤’은 낯설 만큼 고요하게 느껴집니다. 이날 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요?

수수께끼로 가득한 밤

이 그림은 고갱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살던 타히티의 작업실에서 발견됐습니다. 고갱이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 지역의 마을인 퐁타벤에 머물 때인 1894년 그리기 시작해 1902∼1903년 완성된 유화입니다. 고갱의 서명이 그림 오른편 조각상 아래 단에 보입니다.

먼저 나란히 걸어가는 소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 그림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린 것이라면, 두 마리 소는 그를 축복하러 가고 있는 것이겠죠. 후대 사람들은 이 작품의 제목을 ‘크리스마스 밤(황소들의 축복)’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들은 브르타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보고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렇게 시대와 지역이 뒤죽박죽 섞인 대목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들판에 펼쳐진 오두막과 첨탑은 퐁타벤의 풍경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퐁타벤에서 약 20km 떨어진 르풀뒤라는 지역 사람들이 쓰던 것입니다. 물론 둘 다 브르타뉴 지역이니 둘을 섞어도 크게 이상하진 않죠.

그러나 여기에 이집트 벽화의 소가 등장하며 시대는 수천 년 전, 거리는 수천 km까지 벌어집니다. 게다가 오른쪽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줄 알았던 돌 조각은 고갱이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어느 서원 사진에서 가져온 모습입니다. 그러니 힌두교나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조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크리스마스의 이미지

고갱이 왜 이렇게 시대와 지역, 심지어 종교까지 마음대로 거리를 벌렸는지 알기 위해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다른 그림을 살펴봤습니다. 우선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이미지는 대부분 상업 광고나 일러스트가 미디어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됐습니다. 20세기 미국에서 사랑받았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로크웰(1894∼1978)의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니 산타, 루돌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의 역사는 100년이 채 넘지 않은 셈입니다. 이런 것을 제외하면 수백 년 동안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수태고지 같은 종교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한 게 다수였습니다. 조토의 ‘탄생’(1303∼1305년)이나 보티첼리의 ‘신비한 탄생’(1500∼1501년), 뒤러의 ‘동방박사의 경배’(1504년) 같은 작품들이죠. 물론 이들은 교회가 의뢰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마리아와 예수 등 인물을 좀 더 인간적으로 그리거나,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초호화로, 또 성인들의 옷도 화려하게 장식적으로 그리거나 하는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크리스마스를 표현하는 그림이란 성경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설명하고 알리기 위한 목적의 설교적인 것들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19세기 이전의 크리스마스 그림, 그리고 화려함과 따뜻함으로 무장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대의 크리스마스 장식. 그 사이에 고갱의 ‘크리스마스 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신비로움

고갱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 뛰어난 화가들은 수백 년의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러니 고갱이 엉뚱한 이미지를 가져와 섞은 것은 천사들이 내려와 축복하고 동방박사가 경배하며, 마구간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보고 기뻐하는 ‘전형적인’ 크리스마스를 벗어나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고갱은 이 ‘챌린지’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을까요? 서로 관련 없는 형태들을 가져와 크기와 선, 배치를 조정하며 만들어내는 ‘고유의 리듬’을 고갱은 무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집트 벽화 속 소들의 머리 선, 르풀뒤 마을 여자들 모자의 선, 그리고 퐁타벤 마을 오두막의 동그랗게 솟은 처마 아래 윤곽선이 음악처럼 그림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처음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은 그림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푸른색의 부조가 무게감을 더합니다. 그리고 노을, 여자들의 얼굴, 눈이 녹은 길의 오렌지빛은 좌우로 펼쳐지며 수평선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브르타뉴에서 타히티로 캔버스를 가져가며 고갱이 이 낯선 그림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결국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배웠던 것에서 벗어나 수천 년 전 과거 현재, 수만 리 떨어진 곳과 여기 사이에서 모색하는 ‘자기만의 신비로움’입니다.

2025년의 크리스마스이브를 시끌벅적하게 보냈다면, 오늘 아침은 고갱의 고요한 ‘크리스마스 밤’으로 마음속 깊은 곳 신비로운 세계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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