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잘못된 아이가 아니야”…그 말 하나로 9년 버틴 청년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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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인터뷰 ③
보호경험 청소년에서 9년째 ‘돌봄의 선순환’ 잇는 박유미 씨

박유미 씨(왼쪽)가 청소년 쉼터 봉사자와 12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시상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유미 씨(왼쪽)가 청소년 쉼터 봉사자와 12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시상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쉼터에서 처음 “넌 잘못된 아이가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던 소녀가 있다. 그 말 하나가 한 그를 바꿨고, 소녀는 다시 수백 명의 아이를 바꾸고 있다. 도움받던 아이에서 손 내미는 어른까지, 박유미 씨(21)의 9년은 그렇게 쌓였다.

중학생이던 2017년, 박유미 씨는 처음으로 청소년 쉼터와 기관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보호시설에서 지내던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자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에 새겼던 그 다짐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그의 이름 앞에는 GKL 사회공헌상 ‘행복나눔상’이라는 타이틀이 더해졌다.

● “저를 붙잡아준 손길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처음 박유미 씨를 마주한 사람들은 지레 짐작한다. ‘이 청년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겠구나.’ 하지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선입견은 깨진다. 박유미 씨는 자신이 보호시설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담백하게 말했다.

정말 힘들던 시기에 저를 붙잡아준 어른들이 있었어요. ‘넌 잘못된 아이가 아니야’라고 계속 말해주셨거든요. 그게 제 인생을 바꿨어요.”

조용한 말투 속에는 단단한 결심이 깃들어 있다. 그의 과거는 지워야 할 그림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온기를 건네게 만든 출발점이다.

● “나는 소중한지조차 몰랐던 아이였어요”

그의 어린 시절에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단어들이 겹겹이 얹혀 있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 중독에 시달리던 부모, 깊어지는 갈등, 반복되는 폭력과 불안. 청소년기에는 우울이 극심해져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을 만큼, 극단적인 생각에서도 멀지 않았다.

“뭐만 되면 제 탓 같았어요. 스스로를 싫어하고 자학하는 마음이 많았죠.”

그에게 쉼터는 처음으로 ‘안전하다’고 느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넌 성실해.”
“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넌 잘못된 아이가 아니야.”

친가족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믿어준 어른들이었다. 그 말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을 버티게 하는 문장이 됐다.

● 2017년부터 2025년까지, 9년 동안 이어진 발걸음

그의 봉사는 중학교 2학년이던 2017년으로 돌아간다. 이후 내내 청소년 공간과 인연을 이어갔고, 대학생이 된 2023년부터는 교육·상담 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쉼터,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까지. 그가 만난 아이들은 약 400명, 공식 봉사시간만 250시간을 넘는다.

“한 번 왔다가 사라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아니까…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그의 일상은 여유롭지 않다. 쉼터에서 독립한 뒤 보증금과 월세, 생활비, 앞으로 준비 중인 대학원 등록금까지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패밀리레스토랑, 편의점 야간 근무 등 10곳 넘는 일자리를 전전했다.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근무지로 향했고, 남는 시간은 다시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쪼개 썼다.

“알바랑 학업을 같이 하다가 자퇴 고민도 했어요. 그래도 언젠가 받은 걸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있었어요. 버텨보자,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대부분의 또래들이 “살기 바쁘다”며 자기 몫을 챙길 때, 그는 팍팍한 하루에서 시간을 조금씩 떼어 누군가의 하루로 건넸다.

박유미 씨가 야간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보호시설에서 지내던 시절 받았던 돌봄은, 이제 그가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 됐다.
박유미 씨가 야간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보호시설에서 지내던 시절 받았던 돌봄은, 이제 그가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 됐다.
● 교재, 태블릿, 밥 한 끼… “세상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그가 기억하는 장면들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작고 구체적이다. 학습 도구가 없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던 아이가 있었다. “집에서라도 공부해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교재도, 태블릿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도 빠듯했지만… 그 친구는 정말 절실해 보였어요. 제가 조금 덜 먹더라도, 그 아이한테는 태블릿이 훨씬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가 ‘세상이 나쁘지만은 않구나’를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결국 그는 생활비를 아껴 EBS 교재와 저가형 태블릿PC를 사서 건넸다. 그 아이는 그 뒤로 자격증을 다섯 개나 취득했다.

또 다른 아이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만큼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박유미 씨가 해준 일은 의외로 단순했다. 따뜻한 밥을 사주고, 조용히 이렇게 말해주는 것.

“넌 소중한 사람이야.”

기관 담당자는 “그 말을 들은 뒤로 아이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으로 ‘나도 소중할 수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들은 아이는, 그날 이후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 “나도 누나처럼 되고 싶어요” …말은 다시 돌아온다

그가 아이들을 만나며 목격한 장면 중에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검정고시 합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한 청소년은, 그와 함께 공부를 이어가며 결국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는 바리스타라는 새로운 꿈을 준비 중이다. 태블릿을 선물 받았던 또 다른 청소년은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선택했다.

“누나처럼, 나도 나중에 누군가를 돕고 싶어요.”
그 말은 과거 박유미 씨가 쉼터에서 대학생 멘토들을 보며 마음속에 품었던 문장을 거의 되풀이한 말이었다.

공식 봉사가 끝난 뒤에도 그는 5명 안팎의 청소년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준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그 아이들의 어려움도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그의 봉사는 화제가 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쉼터의 작은 방, 청소년센터의 책상, 동네 카페 구석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시간들이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만든 변화는 작지 않다. 누군가는 진로를 찾았고, 누군가는 희망을 되찾았다. 누군가는 미래의 자신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받은 사랑이 제 안에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흘러가서 또 다른 누군가가 버틸 힘이 되었으면 해요.”

박유미 씨(오른쪽)가 12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시상식에서 행복나눔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경 GKL사회공헌재단 이사장, 박유미 씨.
박유미 씨(오른쪽)가 12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시상식에서 행복나눔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경 GKL사회공헌재단 이사장, 박유미 씨.
● “이 상이… 그냥 계속하라는 신호 같아요”

12일 박유미 씨는 ‘이웃사랑실천상·GKL사회공헌상’ 행복나눔상을 받게 됐다. 그는 “아직도 얼떨떨하다”며 웃었다.

“솔직히 제가 이 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요. 저보다 대단한 분들 정말 많으니까요. 그래도… 이게 계속 하라는 신호라고 생각하려고요.”

앞으로도 그는 아동·청소년, 특히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언젠가 현장에서 더 깊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취업을 하더라도, 대학원에 진학하더라도, “그 안에 봉사는 계속 들어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도움을 받던 아이였던 한 사람. 지금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어른. 박유미 씨의 9년은 그렇게,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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