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오해해서 미안”…‘악동’ 이천수 ‘영웅’이 되다 [e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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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7월 8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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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기사 외침에 슬리퍼 신고 1km 빗길 뛰어
이천수 측 “가족들이 제일 기뻐해”

스포츠동아DB/뉴스1
스포츠동아DB/뉴스1

그라운드의 ‘악동’ 이천수(42)에게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다. 음주운전 뺑소니범을 잡은 데 이어 여자화장실 몰카범까지 잡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천수가 뺑소니범을 맞닥뜨린 건 4일 오후 10시 40분경이다. 서울 동작구 동작역 인근 올림픽대로. 방송 촬영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에 정체 중인 카니발 차량 안에 있을 때였다.

“차가 왜 이렇게 막히지?” 하고 있는데, 약 100m 전방에서 40대 남성이 달려가고 그 뒤를 고령의 택시기사가 힘겹게 쫓아가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대로에서 음주뺑소니범이 달아난 방향으로 뛰고 있는 이천수 (소속사 제공)
서울 올림픽대로에서 음주뺑소니범이 달아난 방향으로 뛰고 있는 이천수 (소속사 제공)

힘이 부친 택시기사는 “좀 도와주세요. 저 사람 좀 잡아주세요”라며 소리쳤다. 음주운전자가 택시를 추돌한 뒤 차를 버리고 달아나던 상황이었다.

이천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차에서 내려 도망가는 남성을 뒤쫓았다. 슬리퍼 차림이었다. 매니저도 함께 쫓기 시작했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이천수는 올림픽대로를 1km가량 달려 남성을 붙잡았다.

하필 달리는 방향은 오르막길이었고, 달아나던 남성은 운동선수 출신인 이천수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천수는 “운동하는 사람이 막 치고 올라가니까 그분이 결국 멈추더라. 우리도 힘든데 그분은…”이라고 떠올렸다.

이천수는 “(도망가는 사람이)앞에 보이는데 못잡겠더라 ‘마라톤이 이런거구나. 왜 앞에 있는 사람을 못잡지?’ 생각했었는데, ‘아 이게 잡기가 쉬운게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너무 다급해서 초반 스파트를 너무 빠르게 시작했다”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설명했다.

뺑소니범을 잡아 경찰에 넘겨준 뒤 차로 돌아오고 있는 이천수 (소속사 제공)
뺑소니범을 잡아 경찰에 넘겨준 뒤 차로 돌아오고 있는 이천수 (소속사 제공)

이후 이천수는 출동한 경찰에게 남성을 인계했다. 택시기사에게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켰다. 뒤늦게 이천수를 알아본 택시기사는 “어? 이천수 선수 아니세요?”라며 놀랐다. 그제야 이천수는 자신이 모자도 안쓰고 슬리퍼 차림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재빨리 현장을 떠났다.

이천수는 “처음엔 음주운전인지 뭔지 모르고 나이 드신 분이 좀 다급해 보이기에 그날따라 무슨 정의력이 살아났는지 갑자기 뛰어가게 됐다”고 후일담으로 밝혔다.

‘FC불나방·풍운아’ 구설 제조기 이천수
이천수가 심판에게 욕설 포즈를 취하는 모습. 당시 중계방송 화면 캡처
이천수가 심판에게 욕설 포즈를 취하는 모습. 당시 중계방송 화면 캡처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이천수는 스페인 라리가와 네덜란드·일본 무대를 거쳐 인천 유나이티드FC 등에서 활약했다.

이천수는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남다른 기량을 보이며 한국 축구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스피드를 가졌으며, 방향전환과 함께 순간적으로 가속을 붙이는 능력이 좋았다. 거기에 발재간, 정교한 크로스와 킥 능력은 아시아 원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전성기였던 2002년 월드컵 때는 차두리만큼 빠르고 박지성만큼 많이 뛴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성격이 통제가 안됐다. 지나친 자신감과 거침없는 감정 표현으로 그야말로 ‘언터처블’이었다. 서포터즈에게 ‘손가락욕’(2003)을 하거나 심판에게 ‘주먹감자’(2009)를 날리는 등 잦은 구설에 올랐다. 코치와 주먹다짐, 팀 무단이탈, 술집 다툼 등 선수생활 내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본인 스스로도 ‘FC불나방’이라고 표현한다.
이천수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선수의 머리를 차는 모습. MBC라디오스타
이천수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선수의 머리를 차는 모습. MBC라디오스타

선수와 충돌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2002 한일월드컵 때 이른바 ‘말디니 사커킥’이 그중 하나다. 이천수는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볼 다툼 중 넘어진 이탈리아 수비수 ‘파울로 말디니’의 뒤통수를 발로 가격했다.

훗날 이천수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우리 형들을 무시하는 게 보여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랬다. 그땐 정말 몰랐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일부러 걷어찼다. 선배들 복수 차원에서 했다”고 고백했다.

선배 최진철은 이천수의 첫 이미지에 대해 “와 당돌하다. 참 싸가지 없다” 생각했다고. 대표적인 예로 ‘명보야 밥먹자’ 일화가 유명하다.

2002 월드텁 당시 막내였던 이천수는 가장 고참 선배였던 홍명보에게 대뜸 반말을 던졌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선후배간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 내린 미션이었다. 이천수는 “명보야 밥먹자”라며 바로 실행에 옮겼다. 최진철은 “내 귀를 의심했다. 저거 또라이 아냐? 미쳤구나 싶었다. 나한테 시켰으면 못했을 텐데 이천수는 바로 나오더라. 우린 그렇게 못한다”고 회상했다.
인천유나이티드 전력강화실장 시절 경기 후 눈물을 훔치는 모습. 카카오TV영상 캡처
인천유나이티드 전력강화실장 시절 경기 후 눈물을 훔치는 모습. 카카오TV영상 캡처

‘가장’이 된 이천수는 언제부턴가 ‘캐릭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2019년 인천 유나이티드 전력강화실장 시절 경기장 벤치에서 후배 선수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친 것이 크게 화제 됐었다. 평소의 이천수 이미지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이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 눈물은 작고한 유상철 감독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은퇴 후 이천수는 유튜브에서 ‘리춘수’라는 개인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뛰던 시절 얻은 별명이 리춘수다. 당시 현지 팬이 어눌한 발음으로 ‘리춘수’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하필 이 발음이 입에 착 달라붙어 그의 타이틀이 됐다.

이 채널에서 이천수는 그라운드의 악동이었던 과거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축구 심판’ 자격증에 도전하기도 했다. 심판으로 경기에 임하면서 자신의 과거 행동을 되돌려 받는 모습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2021년 6월 KFA 5급 심판 자격증을 취득했다.

“오빠 사고쳤어?” 반전 소식에 아내 감동
자녀들과 놀고 있는 이천수 (이천수 인스타그램)
자녀들과 놀고 있는 이천수 (이천수 인스타그램)


이천수가 뺑소니범을 잡은 다음날 아침 기사가 쏟아지자 아내 심하은이 처음 보인 반응은 “오빠 사고쳤어?”였다. 과거에는 주로 ‘논란’ 기사에 등장했던 터에 이번 기사 댓글에도 “천수야 미안하다. 뺑소니범이 넌 줄 알았다”라는 농담이 달리기도 했다.

이천수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경찰관도 범인이 난줄 알더라. 그래서 ‘저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했다”며 “아내는 내가 사고친 줄 알고, 기사가 많이나고 그러니까. 그날 너무 뛰어서 집에와서 탈진해서 자고 있는데, 너무 자니까 아내는 ‘사고쳤나?’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소속사 관계자는 동아닷컴에 이천수의 가족들이 제일 기뻐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천수는 옛날부터 워낙 화제가 많이 된 인물이고, 그래서 자랑 같은 것도 잘 안하는데, 이번 일로 아내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했겠냐”며 “그런데 천수는 이걸로 화제 되고 하는 게 쑥스러워서 인터뷰도 잘 안 하려고 한다. 어그로 끄는 것처럼 보일까 봐”라고 말했다.

아내는 페이스북에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기절해서 자더라. 피곤한 줄 알았는데 아침에 전화 오고 기사가 났더라”며 “사실 몇 년 전 여자화장실 몰카범도 차를 타고 도주하는데 뛰어가서 잡았었다. 그땐 자녀들이 어려서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무서워서 쉬쉬했다. 칭찬해 이천수”라고 남편을 자랑했다.

이천수는 “그동안 못한 건 이슈가 많이 됐다. 솔직히 좋은 일을 많이 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사고만 치고 사는건 아닌데, 중간중간 좋은일 한건 뭍히니 내 이미지가 안 좋게 비춰졌다”고 말했다.

현재 이천수의 인스타그램에는 “형님 까방권(까임 방지권) 10개 획득 축하드립니다” “영웅 리춘수” “음주뺑소님범 잡아줘서 고마워요” “1km 빗길에 잡다니, 이게 바로 우천취소 안 되는 축구 국대 출신” “쉬운 게 아닌데 정말 멋지십니다”라는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이천수는 소속사를 통해 동아닷컴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상황에선 누구든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알려져 쑥스럽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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