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대원 꿈꾸는 소녀, 눈먼 법 앞에 신용불량 ‘굴레’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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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 <1> 법이 보호 못한 ‘미성년 파산’

“고등학교 3학년인 저는 고1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꾸준히 생활비를 보태 왔습니다. 언니는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를 다닙니다. 만약 파산면책결정이 난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처럼 열심히, 아니 더 열심히 살 것입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조민영(가명) 씨는 열여덟 살이던 2019년 ‘채무증대 및 지급불능 경위서’를 쓰던 때를 아직 잊지 못한다. 이름조차 낯설었던 이 서류는 개인이 법원에 파산과 면책을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하는 일종의 진술서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불운에 의해 빚을 떠안았고, 형편상 갚기가 어렵다는 걸 명확하게 드러내는 게 ‘작성 요령’이다.

민영 씨가 이런 경위서를 써야 했던 건 어머니가 2016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며 남긴 빚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이미 집을 떠나 안 보고 산 지가 오래됐다. 하지만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발생한 카드 빚과 대부업체 대출은 원금 약 1500만 원에 이자 약 3500만 원이 더해져 50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도저히 갚을 여력이 없어 법률구조공단에 자문해 경위서를 썼어요. 기억나던 시절부터 살아온 삶을 줄줄 쓰다 보니까 너무 착잡했어요. 제가 봐도 답이 안 보이더라고요. 다른 또래 친구들은 이런 삶을 안 살 것 같은데….”

○ 미성년자에게 더 불리한 현행법
민영 씨는 이 빚을 피할 방법이 없었을까. 민법은 빚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상속받지 않는 ‘상속포기’나 물려받은 재산의 범위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승인’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고인 사망 뒤 3개월 안에 법원에 신청해야 효력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점은 2016년이었고, 남긴 빚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19년이었다.

게다가 당시 민영 씨가 성인이 아니었던 점이 불합리하게 작용했다. 민법은 ‘특별한정승인’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상속인 본인이 빚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경우 그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신청하면 한정승인을 인정해준다.

하지만 민영 씨는 빚을 물려받을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이 적용을 받지 못했다. 법정대리인인 아버지가 빚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아버지는 부인의 빚이 두 딸에게 상속됐다는 내용의 체납 고지서를 여러 차례 받았다. 민영 씨는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냥 집에다 쌓아만 뒀다고 한다”며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같은 게 있는 줄도 모르셨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남긴 빚이 있고 이를 갚아야 한다는 것도 언니의 통장이 전부 압류되면서부터였다. 황당한 심정으로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갔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상속포기 등의 신청 기한을 한참 넘겼습니다. 개인 파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결국 민영 씨는 고3이던 2019년 10월 개인 파산을 신청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돼 버렸다.

“늘 어려웠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어요. ‘어른이 되면 열심히 벌어서 지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도 했고요. 그런데 갑자기 몰랐던 빚더미에 깔려 버린 거죠.”

○ “엄마 구하러 오던 구급대원 되는 게 꿈”
민영 씨의 꿈은 119구급대원이다. 현재 응급구조학과 2학년에 다니며 소방공무원 채용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고3 때 파산 결정을 받은 민영 씨는 앞으로도 3년 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한다. 면책됐기 때문에 소방공무원이 되는 데 걸림돌은 없지만 여전히 대출도 신용카드 발급도 할 수 없다.

그런 민영 씨가 구급대원이 되려 하는 건 빚을 남긴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간경화로 많이 아프셨다. 한 달에도 여러 차례 구급차를 불러야 했다고 한다. 민영 씨는 “그럴 때마다 5분도 안 돼 달려와 주는 구급대원들을 보며 감명받았다”며 “1초라도 빨리 사람을 살리러 달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2년 전 경위서에 ‘어려운 형편이지만 좌절하지 않겠다’고 썼어요. 희망까지 내려놓고 싶지 않았거든요. 2년 전 아버지도 뇌졸중으로 쓰러져 힘들지만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50만 원 정도씩 가계에 보태고 있어요. 장학금으로 학비도 마련하고 있고요. 신용불량자다 보니 학자금 대출이 안 되거든요. 아이들이 부모의 빚에 짓눌리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요. 사회에 나가 보지도 못하고 파산하는 기분은, 겪어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獨-佛은 민법으로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
佛, 미성년자 별도 보호장치
‘재산<빚’ 경우 물려받지 않게 규정
獨, 성인 된 시점 재산만큼만 상환



빚더미에 깔린 아이들이 해외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개인파산을 신청할 필요조차 없다.

일단 영국과 미국 등은 빚이 자연적으로 유족에게 승계되지 않는다. 한국처럼 ‘당연 승계주의’ 원칙을 갖고 있는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다. 누군가 사망하면 재산이나 빚이 자녀와 조손, 형제·자매 등에게 대물림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민법은 미성년자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빚더미에 앉지 않도록 법으로 보호 장치를 마련해뒀다. 프랑스는 법 제정 때부터 미성년자에 한해 물려받은 재산보다 빚이 더 클 경우 빚을 물려받지 않도록 만들었다.

독일은 미성년자가 빚을 물려받아도 성인이 된 시점에 가진 재산만큼 갚으면 된다. 1998년 개정된 독일 민법은 “상속된 빚에 대한 책임은 미성년자가 성인이 되는 시점에 가진 재산으로 한정된다”고 새로이 규정했다. 하지만 국내 민법은 미성년 상속인을 위한 보호 장치가 없다. 아이의 친권자 등 법정대리인이 부채를 인지한 시점부터 3개월 안에 상속포기 신청 등을 하지 않으면 빚을 물려받은 것으로 본다.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미성년일 때 빚을 상속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된 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빚을 물려받는 건 부당하다”는 취지로 낸 소송을 기각했다. 당시 “현행 민법에는 이들을 보호할 만한 법 조항이 없다”고 판시했다. 다만 입법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했다. 반대 의견은 물론이고 다수 의견까지 만장일치로 “채무를 상속한 사람이 미성년인 경우 여전히 보호의 사각지대가 남아있다. 당연승계주의를 취하는 다른 국가들은 미성년 상속인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이 10일 대표 발의한 민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는 이런 문제점을 고치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송 의원 등은 “현행법은 미성년 상속인이 상속채무를 부담하고 성년이 돼도 구제받을 수 없는 가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친권자 또는 후견인이 승인을 했더라도 미성년자는 한정 승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적시했다

김성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도 “대법원이 입법 필요성을 제기한 만큼 하루빨리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미성년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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