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 골목’ 을지OB베어 퇴출 위기…단골·주변상인들 “백년가게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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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4월 26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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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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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게에 들어서면 내 20대 시절이 보이는 것 같아.”

26일 오전 서울 중구에 있는 일명 ‘노가리골목.’ 이곳의 유명 주점 가운데 하나인 ‘을지OB베어’에 앉아있던 윤제훈 씨(61)는 상념에 잠긴 듯 한마디 했다. 윤 씨는 “내 청춘이 담긴 곳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했다.

1980년 문을 열어 41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을지OB베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2018년 건물주 측이 “임대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 명도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업소 측은 지난해 최종 패소해 가게를 비워줘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강제집행을 시도할 때마다 윤 씨와 같은 단골고객과 주변 상인, 시민단체 등이 나서서 막아서고 있다.

26일은 세 번째 강제집행이 예고된 날. 을지OB베어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인근에서 50여 년 동안 가게를 운영해온 이효용 씨(71)는 “수 년 동안 안주 가격도 안 올리고 장사해온 가게다. 고마운 마음을 갚고 싶어서 1차 강제집행 때부터 계속 왔다”고 말했다. 을지OB베어 맞은편에 있는 유명주점 ‘뮌헨호프’의 정규호 사장(78)도 “다른 호프집이 다 없어지는 걸 보면서도 30년 가까이 함께 이 골목을 지켜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날 강제집행이 취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서울시는 2015년 노가리골목 전체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을지OB베어도 중소벤처기업부가 2018년 선정한 ‘백년가게’에 이름을 올렸다. 장인에게 을지OB베어 물려받아 운영해온 최수영 씨(66)는 “‘노가리골목’이란 말이 생기기 전부터 이 자리에서 장사했다”며 “노가리골목과 우리 가게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공기관이 개인 분쟁에 개입하기도 어렵다. 서울시 관계자는 “미래유산의 선정 취지는 상인들의 자발적인 보전 독려를 위한 것으로, 건물주와의 분쟁에 시가 개입할 명분은 없다”고 말했다. 중기부 측도 “백년가게의 노후 시설 교체 등을 돕는 사업은 진행하지만 개인 분쟁에 개입할 순 없는 노릇”이라고 전했다.

건물주 측 법률대리인은 2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임대차 분쟁 관련 입장은 을지OB베어에 모두 서면으로 전달했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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