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성범죄자 거주지 가보니
주변 건물 대부분 필로티 구조… 야간 CCTV 감시망서 벗어나
‘안심지킴이집’ 지정된 편의점, 대처요령 묻자 “교육받은 적 없어”
전문가 “환경 바꿔야 성범죄 막아”
아동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4차례 저지른 사람의 거주지 인근 골목의 가로등이 철판으로 가려져 있다. 밤이
되자 해당 골목 안 조도가 0∼1럭스(LUX)로 측정됐다. 이는 약 10m 떨어진 사람의 형체만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출소한 지 딱 8일 만이었다는데….”
서울 강남구 주민 A 씨는 한 건물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올해 3월경 이 건물에서 아동·청소년 성범죄자 박모 씨(44)가 13세 여중생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
박 씨의 범행 경과는 여러모로 조두순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는 조두순이 범행한 2008년 다수의 중학생을 인근 건물 등으로 끌고 가 범행을 저질렀다. 수법도 비슷하고 법정에서 ‘심신 미약’을 주장해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것도 닮았다. 그런 박 씨가 출소 뒤 8일 만에 다시 미성년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 여성안심구역 없고 CCTV와 가로등마저 부실
동아일보 조사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2회 이상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자 40명의 거주지 반경 1km 내 여성안심구역 개수는 평균 1.15개다. 여성안심구역이 없는 지역은 17곳, 여성안심귀갓길이 없는 지역이 7곳이었다. 이 중 5곳은 둘 다 선정돼 있지 않았다.
폐쇄회로(CC)TV 개수는 반경 1km 내 평균 147개로 분석됐다. 하지만 많게는 382개부터 적게는 7개까지 지역마다 편차가 컸다. CCTV 개수 하위 20곳 중 15곳이 경기 지역이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범죄예방설계(CPTED) 전문가들과 함께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재범들의 거주지 인근을 직접 살펴봤다. 전문가들은 현장을 둘러보며 “곳곳에 범행에 유리한 환경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동 성범죄 전과 2범인 A 씨의 거주지 반경 1km 내 방범용 CCTV는 32대뿐이다. 여성안심구역은 없으며, 거주지와 약 500m 떨어진 곳에 여성안심귀갓길만 1곳 있다. A 씨가 사는 골목 끝 CCTV 4대가 함께 설치돼 있었지만, 주변 건물이 ‘필로티 구조’인 탓에 곳곳에 사각지대가 생겼다.
흔히 쓰이는 건축 방식인 필로티 구조는 범죄에 매우 취약하다. 한국셉테드학회장을 지낸 이경훈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는 “필로티는 CCTV의 사각을 만들고 야간에는 주변 조명도 가린다”고 했다. 박 씨가 피해자를 끌고 가 범행을 저지른 곳도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었다.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 전과 4범인 B 씨의 거주지는 가로등마저 문제였다. 인근 골목에 설치된 가로등이 철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자 골목은 사람의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어두워졌다. 이민식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빛 공해 민원에 따른 조치로 보이는데, 야간 시야 확보는 범죄 예방의 핵심 요소다. 가로등을 쓸모없게 만드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B 씨의 집 앞 편의점은 ‘여성안심지킴이집’이다. 위협을 느낀 여성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시와 협약돼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던 직원은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B 씨의 거주지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엔 어린이집이 2곳이나 있었다.
○ 관리 어렵다면 예방 환경부터 만들어야
성범죄자들의 거주지 반경 1km 내 범죄예방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자발찌를 착용한 성범죄자가 재범을 저지른 사건 292건 가운데 157건(54%)이 거주지 반경 1km 내에서 일어났다. 박 씨가 범죄를 저지른 장소도 거주지에서 1km 안이었다. 그의 범행 장소는 여성안심구역도, 여성안심귀갓길도 아니었다. 박 씨가 피해자를 끌고 가는 장면이 찍힌 CCTV는 도주한 박 씨를 추적하는 데 활용됐을 뿐 예방 효과는 없었다.
10월 법무부와 여성가족부, 경찰이 내놓은 ‘조두순 출소 대비 재범 방지를 위한 관리방안’에서도 주거지 반경 1km를 강조하고 있다. 방안에는 △조두순 주거지 반경 1km 내 여성안심구역 지정 △CCTV 증설 △전담 보호관찰관 지정 △관할 경찰서 특별대응팀 편성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조두순만을 위한 조치일 뿐, 박 씨와 같은 다른 성범죄자들은 여전히 수십 명을 관리하는 일반 보호관찰관의 몫이다.
전문가들은 조두순만이 아닌 불특정 성범죄자들의 재범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경훈 교수는 “조두순 출소를 앞두고 시민들이 불안한 이유가 꼭 조두순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며 “모든 성범죄자에 대해 조두순에 버금가는 감시 조치를 당장 시행할 순 없더라도, 적어도 어두운 골목의 조도를 개선하거나 사각지대를 조금씩 없애 나가는 등 작은 것부터 해결해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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