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조선시대엔 과거시험으로 ‘나라의 인재’ 뽑았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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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넘게 유지된 과거제도는 조선시대 정치와 사회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 10월 서울 구로구가 개최한 ‘과거 시 경연대회’에 참가한 어린이가 진지하게 시를 써내려가는 모습. 동아일보DB
900년 넘게 유지된 과거제도는 조선시대 정치와 사회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 10월 서울 구로구가 개최한 ‘과거 시 경연대회’에 참가한 어린이가 진지하게 시를 써내려가는 모습. 동아일보DB
과거제는 고려 광종 9년(958년)부터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유지됐습니다. 오랜 공부 끝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사회의 지배층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과거제는 정치와 사회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선시대 문과 시험을 중심으로 응시생의 시험 준비와 시험 진행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과거 시험 준비는
양반가에서는 남자 아이가 5, 6세가 되면 선생님을 모셔오거나 주변 친척집 등에서 기초적인 한자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좀 자라면 향교, 4부 학당, 서원 등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학생들은 천자문, 동몽선습, 격몽요결 등을 배운 뒤 논어, 맹자 등 유교의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했습니다. 본문을 한 글자씩 배운 뒤 모두 암기하는 방식이라서 천자문을 공부한 학생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서 쓸 수 있었습니다.

과거 준비생은 경전과 역사서를 기본적으로 공부하면서 동시에 문학적 소양을 쌓았습니다. 시를 규칙에 맞게 쓰고 문장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글자의 시를 쓰다가 과거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는 약 100글자가 들어간 시를 완성할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랏일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경전에서 배운 지식과 역사에서 배운 사례들을 통해 자신이 사는 시대와 사회를 해석했습니다. 이런 공부를 20년 정도 하면 과거를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경제력도 바탕이 되어야 했습니다. 20년 이상 공부에 몰두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준비와 합격은 경제적 여유, 가문의 전통, 개인의 노력과 능력 등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세 가지 조건 외에 자신의 가문이 어느 붕당에 속하는가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서인, 남인, 노론, 소론 등이 치열하게 권력 싸움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한 가문과 연결된 붕당이 권력을 잡으면 합격에 훨씬 유리했겠지요.

○ 과거 진행 과정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 실시하는 정기 시험과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치르는 비정기 시험이 있었습니다. 정기 시험은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소과 시험은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뉩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앞 구절을 몇 글자 보여주면 이후 문장을 암송하거나 질문에 답하는 구술시험이었습니다. 진사시는 문학적 소양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詩)와 부(賦·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한문 문장으로 표현)를 작성하는 필답시험이었습니다. 소과 1차 시험은 인구 비례에 의해 지역별로 선발 인원(생원 700명, 진사 700명)이 정해져 있었고, 응시생은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1차 합격자들이 한양에 모여 치르는 2차 시험에서는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선발했습니다. 소과에만 최종 합격해도 향촌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하급 관리로 채용될 수 있었습니다.

소과에 최종 합격한 선비들은 성균관에서 300일 이상 출석 수업을 한 후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불합격하면 3년 후에 다시 시험을 보거나 비정기 시험을 기다리며 공부했습니다. 대과는 3차에 걸쳐 진행됩니다. 한양에서 실시하는 1차 시험은 성균관 유생 50명과 지역별 인구 비례에 따라 190명을 선발했습니다. 2차 시험에서는 지역 할당 없이 33명을 선발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거 합격자란 대과 2차에 합격한 선비를 말합니다.

3차 시험은 왕 앞에서 실시되었고, 33명의 등수가 정해졌습니다. 3차 시험에서 왕이 출제하는 문제를 책문(策問)이라고 하고, 선비의 답변을 대책(對策)이라고 불렀습니다. 책문은 왕이 국가의 정책이나 삶의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어떤 것인가?’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문과 정기 시험은 163회, 비정기 시험은 581회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합격자 수를 보면 정기 시험 6030명, 비정기 시험 8590명으로 총 1만4620명입니다. 정기 시험은 지역 할당제가 적용되고 여러 단계를 거치는 반면에 비정기 시험은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자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정기 시험은 거의 한양에서 실시되었고, 시험 공고 기간이 짧았습니다. 자연히 한양 출신 혹은 비정기 시험에 대비해 한양에 머무는 지방의 선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었습니다. 소수에게 특권이 주어지는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급제자들을 위해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고위 관료와 급제자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고, 광대가 재주를 보여주었습니다. 장원급제자의 집에 모여 왕에게 드리는 사은례(謝恩禮)를 하고 성균관 문묘에 나아가 알성례(謁聖禮)를 거행했습니다. 삼일유가(三日遊街)라고 부르는 시가행진도 했습니다. 급제자는 왕이 하사한 꽃을 꽂고 거리로 나갔으며, 거리에는 악대와 광대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제자는 한양에서 했던 행사를 고향에서 다시 했습니다. 지방관의 잔치, 시가행진, 향교와 서원의 참배 행사가 연이어 열렸습니다. 특히 지방관은 자신이 통치하는 고을에서 급제자가 나오면 급제자의 부모에게 곡식을 하사했습니다. 과거 급제는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면서 동시에 고을의 자랑이었지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조선시대#과거 시험#과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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