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인 줄 알았는데…’ 주민 제보로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훔친 일당 검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30일 21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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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일당은 성금을 훔치기 위해 며칠째 잠복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를 수상히 여긴 인근 주민의 결정적 제보와 경찰의 발 빠른 대처로 천사의 선행은 20년째 이어지게 됐다.

전주 완산경찰서는 30일 특수절도 혐의로 A 씨(35) 등 두 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5분경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옆에 있는 ‘천사공원’에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이 든 상자를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노송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동사무소 뒤쪽으로 가보세요’라는 전화를 받고 직원들이 나가봤지만 성금을 찾을 수 없었다. 천사가 4분 뒤 다시 전화해 장소를 알려주며 ‘확인했냐’고 물었지만 이미 상자가 사라진 뒤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오전 10시 37분경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로부터 절도 신고를 접수한 뒤 인근 폐쇄회로(CC)TV를 분석하고 탐문수사를 벌여 용의자들의 차량 번호를 알아냈다. 한 주민은 최근 수상한 차량이 주차돼 있자 차량 번호를 적어뒀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이를 전달했다. 이 주민은 “26일과 27일 동네에서 보지 못했던 차가 주차돼 있어 얼굴 없는 천사가 이 때쯤 찾아오니까 기자들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오늘 오전 10시경 세금을 내기 위해 우체국에 가는데 차량 앞쪽과 뒤쪽 번호판이 가려져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을 2003년부터 17차례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전후해 전달해왔다는 것을 용의자들이 미리 알고 잠복 등으로 계획적인 범행을 준비했다고 판단했다. 일당은 오후 2시경 대전 유성구와 충남 계룡시에서 전북지방경찰청의 공조요청을 받고 추적에 나선 충남경찰에 의해 각각 붙잡혔다. 범행 발생 4시간여 만이다. 일당은 붙잡힐 당시 “훔친 돈을 쓰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조사를 위해 전주 완산경찰서로 압송되면서 ‘왜 돈을 훔쳤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을 상대로 자세한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절도범들이 붙잡히면서 성금 6000여만 원도 회수됐다. 훔친 박스에는 5만 원권 지폐를 100만 원 단위로 묶은 현금 12다발과 노란색 돼지저금통,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A4 용지가 들어 있었다.

회수한 돈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르면 직접 피해자인 ‘얼굴 없는 천사’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천사의 선행 취지가 퇴색하지 않도록 피해자를 ‘주민센터’로 특정해 이 돈을 주민센터에 다시 전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 4000원을 주민센터 인근에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매년 수천만¤1억원 상당을 기부했다.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성금 6억 834만 660원을 놓고 사라졌다. 아직 돼지저금통에 든 동전이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은 이번 성금을 포함해 6억 7000만 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노송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천사도 성금 도난으로 많이 놀랐다고 들었다. 범인을 붙잡고 성금을 회수해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주=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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