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간호사…일제 폭거에 ‘독립 만세’를 외치다

뉴시스 입력 2019-02-20 09:57수정 2019-02-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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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 소속 간호사
3·1운동 부상자 치료하며 민족의식 키워
"일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간호사 독립운동단체 '간우회'도 조직
석방 후 병원 돌아왔지만 망명길 올라
1919년 3월1일. 대한민국이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 물결은 서울에 자리한 조선총독부 의원까지 흘러들어갔고, 그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간호사에게도 스며들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이야기다.

박자혜는 당시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 소속 간호사였다. 1910년 9월29일 관제 반포로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 속에서 그녀는 숨을 죽이고 ‘일제의 간호사’로 일했다.

명칭 변경 후 초대 의원장은 일본 육군 군의감이 임명됐다. 주요 임직원 역시 모두 일본인이었다. 1910년 전체 인원 67명 중 60명이 일본인이었고, 1911년에는 전체 88명 중 84명이, 1912년에는 130명 중 98명이 일본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본인은 전체 의원 중 80% 이상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1919년에는 일본인이 95명, 한국인이 18명이 의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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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3월1일은 박자혜의 가슴 속에 ‘독립의 꿈’을 움트게 했다. 수많은 조선인 부상자가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녀노소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피 흘리는 모습은 그녀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박자혜는 그날을 기로로 ‘일제의 간호사’에서 ‘대한 독립 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필주 목사와 연계해 간호사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했다.

박자혜는 의원 내에서 뜻을 같이 할 동지를 모았다. 수많은 조선인 환자를 치료하며 민족의 울분을 함께 터뜨린 조선 의료인들이었다. 그녀는 이들에게 동맹 파업 등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의원 내에서 ‘열변가’로 유명한 피부과 김형익 의사와 함께 비밀리에 연락을 이어가며 조직적 움직임을 도모했다.

외과 신창엽은 3월5일 사직했고, 산부인과 김달환과 연구과 김영오는 각각 3월24일과 3월26일부터 무단 휴무를 감행했다. 내과 김용채도 3월28일 말없이 의원에 나가지 않았다. 소아과 권희목도 3월30일 사직했다. 박자혜의 동료 간호사 4명도 모두 사직했다.

당시 일제의 조선인 감시 보고서 ‘사찰휘보’에 따르면 박자혜를 이렇게 평했다.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

결국 일경은 박자혜를 체포했다. 유치소에 수감됐던 그녀는 다행히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 운동의 책임을 지고 신병을 인수하면서 풀려나게 됐다.

박자혜는 일제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망명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지내던 지인에게 ‘길림성에 계신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는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해 2주간의 휴가를 얻어냈다. 그길로 중국 봉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자혜는 봉천에서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때 우응규는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응규에게 연경대학에 편입학하기 위한 추천서와 노자돈을 받고 즉시 중국 북경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늦은 봄 박자혜는 연경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하며 오롯이 대한 독립의 열망을 키우게 됐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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