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에서 ‘능력자’로… 이력서에 “나는 ○○덕후다”

김배중기자 입력 2016-10-01 03:00수정 2016-10-0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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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덕밍아웃 시대  “저 알고 보면 ‘○○덕후’예요.”

 연예인도 일반인도 다른 사람 앞에서 너나없이 당당히 ‘덕밍아웃’을 하는 시대다. 스스로 ‘덕후’임을 밝힌다는 뜻을 가진 덕밍아웃은 어느덧 자기PR 전략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덕후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어 “쟤 덕후”에서 “저 덕후” 하기에 이르렀다.

‘화성인’에서 ‘고수’ ‘능력자’ ‘성공의 아이콘’으로


크게보기신입사원 채용 공고에 외국어 능력보다 ‘덕력’을 우대한다고 밝혀 화제를 모은 웹툰 플랫폼 기업 레진코믹스(오른쪽 사진). 덕후에 대한 이미지는 2010년 초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덕후 이진규 씨가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했을 때(왼쪽 위 사진)만 해도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엔 배우 심형탁이 도라에몽 덕후임을 밝힌 뒤 인기가 높아질 정도로 긍정적으로 변했다. tvN·MBC TV 화면 캡처·동아일보DB
 2010년 초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덕후 이진규 씨가 덕후로는 처음 TV에 등장했다. 그는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를 ‘데리고’ 다정하게 밥을 먹고 놀이동산에 가는 요상 망측한 일상을 보여줬다. 진행자인 이경규는 “만화 속 캐릭터를 진짜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고 이 씨는 덤덤히 “(캐릭터를 보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흥분된다”고 답했다. 방송이 나간 뒤 온라인에서 누리꾼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과 함께 ‘오덕후보다 두 배 심각하다’는 뜻으로 ‘십덕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최근엔 별나더라도 자기 분야에 몰입하는 덕후의 모습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대세가 되고 있다. 취미 없이 ‘미생’처럼 살아가는 일반인이 특정 분야에 전문가 뺨치는 지식을 갖게 된 이들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 남자들의 취미를 찾아주겠다는 취지로 제작된 케이블TV 채널 XTM의 ‘겟 잇 기어’에서는 건담 플라모델, 무선조종(RC)자동차 등의 수집과 지식 쌓기에 매진해 온 덕후들이 ‘장비 고수’로 등장해 대중에게 생소한 분야에 대해 전문 지식을 곁들여 설명하며 덕후의 세계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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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후를 불러 얘기를 나누는 MBC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은 ‘능력자들’. 방송에 나온 각 분야의 덕후들은 자신들의 ‘덕력’(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마음껏 뽐내며 덕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멋진 능력의 소유자로 뒤바꿨다.

 드라마 속 덕후는 ‘성공의 아이콘’처럼 묘사됐다. 올 초 인기를 끈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김정봉(안재홍)은 ‘성공한 덕후’다. 게임, 영화 감상, 우표 수집 등 자잘한 일이지만 몰입 능력만큼은 뛰어났던 그는 결국 요리에 몰입해 요리연구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SBS 드라마 ‘닥터스’ 속 의사인 정윤도(윤균상)는 재벌 2세다. 하지만 집안 배경과 별개로 그는 철두철미함으로 자신의 능력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캐릭터다. 그의 성격은 연구실 창가에 줄지어 놓여 있는 건담 플라모델이 암시하고 있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순수하면서도 불같이 몰입하는 등 덕후의 이미지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준다”고 말했다.
토익 900 이상? 이젠 ‘덕후’가 더 좋은 스펙

 
과거에 연예인 혹은 연예인 지망생들이 ‘진솔함’을 어필할 때 우선 떠올렸던 것은 눈물겨운 가족사 고백이다. 가수를 뽑는 한 오디션 프로의 경우 출연자들이 제각각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을 뽑아내자 누리꾼은 ‘노래는 없고 사연만 넘치는 오디션’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가족사보단 ‘덕밍아웃’이 더 파장이 크다. 2014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배우 심형탁은 일본 만화 ‘도라에몽’ 덕후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를 계기로 데뷔 20년 가까운 심형탁은 비로소 여러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는 인기 연예인이 됐다. 순수하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인정받아 ‘뇌순남’(뇌가 순수한 남자) 캐릭터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이다. 그는 덕밍아웃 이후 ‘극장판 도라에몽’의 한국어 더빙을 맡기도 했다. 심형탁 이후 연예인이 방송에서 스스로를 ‘○○덕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대중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거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됐다.

 “대학 시절 동안 한 게 ‘덕질’(깊게 몰입) 경험밖에 없어서 이력서에 그 경험을 담았는데, 저 취업했어요(웃음).”(신입사원 서모 씨)

 취업시장에서도 ‘덕후’ 이력은 하나의 스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토익 900점 이상 기본, 각종 인턴 경력, 높은 학점을 과거보다 높게 쳐주지 않는 대신 ‘덕질=일에 대한 열정’을 중요하게 보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다.

 웹툰 플랫폼 기업인 ‘레진코믹스’는 채용 공고에 아예 ‘업무 외에 무언가에 심각하게 빠져 있는 분(자전거, 레고, 다트 던지기, 식도락 등 온갖 종류의 덕질)’이라는 문구를 넣고 외국어 능력보다 더 우대한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업무 능력과 결부시키기 힘든 외형적인 스펙보다 자기 주도적으로 몰입해 결과를 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값진 ‘경험’을 점차 중요시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덕후#오덕후#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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