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달간 약속 안잡아”… 병원 “예약 새치기 뚝 끊겨”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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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첫날 ‘몸조심’ 분위기

서점엔 해설서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서점에 김영란법을 설명하는 책이 비치돼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서점엔 해설서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서점에 김영란법을 설명하는 책이 비치돼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서울 강북지역의 세무서장 A 씨는 28일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평소 다양한 이유로 걸려오던 전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기 때문이다. A 서장은 “청탁을 받았다고 특별히 봐준 적도 없지만 오늘은 단 한 건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며 “분위기가 바뀐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 첫날 불투명한 법 적용에 걸리지 않도록 몸조심하려는 모습들이 전국 곳곳에서 감지됐다. 일상생활 자체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와 청렴한 사회로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교차된 하루였다.
○ ‘약속은 나중에’ 몸 사리는 관료

 김영란법 시행으로 처신에 신중을 기하는 곳은 단연 관료사회다. 특히 업무 특성상 부탁을 많이 받으며 ‘갑(甲)’으로 꼽히는 공무원들은 더욱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의 한 과장은 “어디까지가 업무 설명이고 무엇부터 예산 청탁인지 경계가 모호한데 명확한 해석이 없다”며 “개인적으로 사무실에서 콜라 한 캔도 안 받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모 국장은 “김영란법 행동 요령이 불분명해 10월 약속은 아예 잡지 않고 있다”며 “한 달쯤 여유를 두면서 분위기를 살필 생각”이라고 전했다.

 기업에서도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현대자동차는 이날 이원희 사장 명의로 전 직원에게 “김영란법 취지에 맞게 잘 지키자”는 내용을 담은 e메일을 전 직원에게 발송했다. 현대차 홍보담당자는 “법규를 준수하면서도 고유 업무가 위축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고 전했다. SK텔레콤 홍보팀 직원들은 법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만큼 이날 점심, 저녁 미팅을 취소했다. 네이버는 공공기관과 협업하는 사례가 많은 만큼 김영란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저녁 자리보다는 점심 식사를 권장한다’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사내 게시판에 공지했다.

 은행권은 은행원들에게도 김영란법이 적용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날 신한은행은 전 직원에게 고객 응대 시 김영란법 관련 시비에 휘말릴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지라는 취지의 e메일을 발송하기도 했다.

 관료와 기업 관계자들이 몸을 사리면서 정부청사 인근 식당가 분위기도 달라졌다. 정부세종청사 인근에 식당들이 몰려 있는 ‘세종중앙타운’에서는 단가 1만 원 이하 식당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북적댄 반면 일부 고급 식당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세종시의 유명 한우전문점인 K한우 사장은 “단가를 낮추려고 급한 대로 돼지고기 두루치기 메뉴를 개발했는데 별 반응이 없다”며 “당장 오늘 손님이 평소의 5분의 1 이하로 줄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 “청탁에서 해방됐다” 반기는 분위기도

 법 시행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고위 공무원들과 달리 일선 실무진들은 ‘달라질 게 없다’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기존 공무원윤리행동강령에 업무 및 생활 패턴을 맞춰온 대다수 평범한 공직자들은 김영란법이 시행됐다고 해서 변할 게 없다는 것이다.

 서울지방국세청 주무관 E 씨는 “지금도 내부 규정에 따라 세무조사를 나가면 커피 한 잔도 얻어먹지 못하도록 돼 있다”며 “비리를 저지르는 극소수의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은 평소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병원, 학교 등 평소 청탁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곳들은 김영란법 시행을 크게 반겼다.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는 “병원 개원 이래 수술, 검사 등을 빨리 받게 해 달라는 민원이 이렇게 뚝 끊긴 것은 처음일 것”이라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선 초중고교에서도 김영란법 위반을 원천 봉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서울 강북구의 한 초등학교에는 학교 곳곳에 법 위반 사항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붙여 놨다. 이 학교 교감은 “학부모가 커피 한 잔이라도 사들고 오면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며 “혹시 모르고 사온 물건이 있으면 보안관실에 맡겼다가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수원시의 한 고교 교사는 “수행평가 점수를 잘 받게 해 달라는 학부모들의 부탁이 그동안 많았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며 반가워했다.

편집국 종합
#김영란법#공무원#병원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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