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첫 ‘표지판 조사원’ 신용석씨
“일제에 항거한 3·1운동 장소와 독립운동가 흔적 인천 시내에 많아…
후세 기억 위해 기록으로 남겨야”
프랑스 파리 19, 20구에 있는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동상과 혁명가 보테프 기념 표지판. 신용석 씨 제공
“역사는 책으로만 기록되는 게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천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거리에서 자주 접할 수 있으면 시민들이 살아 있는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을 겁니다.”
2014년 열린 인천아시아경기 유치를 주도했던 신용석 씨(75·전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의장·사진)는 요즘 프랑스 파리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파리 시 산하 역사자료관의 의뢰로 역사적 인물과 사건 현장을 기념하는 표지판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8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파리 동북쪽 외곽인 19, 20구를 집중적으로 돌아다녔다.
“한번에 1, 2개월씩 머물며 걸어서 건물과 거리에 있는 기념 표지판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표지판 위치와 기록된 인물을 사진과 함께 정리해 역사자료관에 넘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표지판 70여 개를 확인했다. 이 중엔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와 같은 유명인을 기념하는 표지판도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파리를 점령한 독일에 대항했던 레지스탕스 운동가를 기리는 것이 더 많았다. 신 씨의 눈길을 끈 표지판 2개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엘렌 자구보위츠. 공산당 여성 당원으로 17세 때 이곳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됐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1942년 9월 25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졌다.’ ‘루리 기. 파리 해방을 위해 싸우다 1944년 8월 24일 이 길에서 총살당했다.’ 17, 24세에 숨진 엘렌과 루리가 체포당하거나 총살당한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
신 씨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의 장소나 형무소에 끌려간 사람을 기릴 수 있는 곳이 인천엔 아주 많다. 그러나 파리에서와 같이 이런 흔적을 남기려는 노력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파리에서 그는 뜻깊은 외국인을 기억하려는 표지판도 상당수 발견했다. 1960년 아프리카 세네갈 독립 때 초대 대통령을 맡아 20년간 집권한 레오폴드 셍고르 전 세네갈 대통령(1906∼2001)이 살았던 집 앞에는 ‘시인이자 휴머니스트, 정치인, 프랑스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고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불가리아 출신으로 시인이자 혁명가인 흐리스토 보테프(1848∼1876)가 살던 집도 마찬가지였다.
유명인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많다고 한다. 에디트 피아프의 경우 동상이 있는 ‘에디트 피아프 광장’을 중심으로 거리뿐만 아니라 주변 학교, 우체국 이름을 모두 그녀 이름에서 따왔다. 또 10층 높이에 150채가량이 몰려 있는 어느 임대아파트 입구엔 사재를 털어 근로자를 위한 아파트를 지은 인물을 자랑하는 표지판이 있었다.
“인천 중구의 답동과 경인전철 동인천역 사이에 한국 미학을 개척한 고유섭 선생(1905∼1944)의 호를 딴 ‘우현로’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근대건축물이 몰려 있는 개항장지구의 절반가량은 편의적으로 ‘신포로’ 몇 길이란 지명이지요.”
신 씨는 프랑스와 인연이 아주 깊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유명 화가인 이성자 씨(1918∼2009)다. 그는 중앙 일간지 기자 시절 파리특파원을 두 차례에 걸쳐 13년간 지냈고,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를 번역한 공로 등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1989년에 받았다.
1920년대 파리에 거주했던 미국 작가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집을 찾기 위해 파리 역사자료관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다 파리 최초로 유일한 ‘표지판 조사원’을 맡게 됐다. 파리시는 그에게 현지 보조원과 차량, 조사 실비를 제공하고 있다. 신 씨는 “2년간 파리 29구 전역에 대한 표지판 조사를 마치기로 했다. 이를 위해 9일부터 2개월 일정으로 또 파리로 떠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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