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때때로 삶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다. 중국집에서 10번을 시켜 먹으면 11번째는 공짜로 탕수육을 주듯, 사는 것도 그럴 때가 많다. 평소에 잘 모아 놓으면 그게 한 번에 돌아온다. 고교 시절 선생님을 붙잡고 몇 번이고 물어 겨우 풀어냈던 수학 문제가 쌓여 결국 괜찮은 점수를 만들었고,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 꾸준히 뛴 덕분에 체중을 감량했다. 서 있는 길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오를 때 그저 묵묵히 내 앞의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이렇듯 성실함은 대개 성공을 보장해 주기에 우리 사회에서 큰 미덕으로 오랫동안 섬겨졌다.
특히 6·25전쟁을 겪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산업화 세대와 온몸을 던져 투표권을 얻어낸 민주화 세대에게는 이 미덕이 진리처럼 작용했다. 성취가 삶의 기준과 목표를 지배하던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하면 된다’ 식의 논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취를 이룩하고 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며 노래 부르는 것 역시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정보화 세대, 글로벌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은 순진하게 성실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마냥 믿지는 않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저성장 시대에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윗세대보다 더 잘살 수는 없음이 자명하다 믿게 되는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다 보니 패배감은 쉽게 아랫세대에 자리 잡는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성실이나 노력은 조롱당하고 홀대받는다. 대신 그들은 시스템의 개혁을 바라고 눈앞의 작은 행복에만 급급해진다. ‘하면 된다’는 구호는 공허해지고 ‘해도 소용없다’는 자조가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은 여전히 견지해야 할 태도로 유효하다고 믿는다.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것보다는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야 개선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내가 되려는 과정 자체가 생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이 배낭여행, 어학연수를 가는 동안 나는 시골 부모님 댁에 머무르며 남들처럼 해외에 가지 못한 아쉬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신세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도시 번화가의 영어학원을 다녔다. 유학이나 교환학생과는 다른 루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새벽녘에 일어나 시골의 작은 역에서 도시행 기차를 잡아타는 것부터 고되고 서러웠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그 자체로 재미가 쏠쏠했다. 방학을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과 매일 성장하는 기분으로 스무 살의 뜨거운 여름을 불태웠다. 이대로라면 곧 외국에 있는 좋은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도 커져 갔다.
물론 애쓴 만큼 모든 일이 잘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준비하던 유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나는 한국에 남아 대학을 마쳤다. 그러나 쏟아부은 노력은 어떻게든 결실을 맺었다. 그때 쌓아 놓은 영어 실력으로 지금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실을 맹목적으로 미화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꾸준히 해온 무언가는 그렇지 않았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결과물을 가져다준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시스템이나 배경의 유무와 관계없이 ‘내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자세가 정말로 우리 생을 변화시킨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세상 탓만 하고 무기력하게 있기 어렵다.
시간은 쏘아 놓은 화살이라더니,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 3월이 되고 새봄 내음이 피어오른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을 봄이 조금씩 밀어내었듯 힘들고 버거운 일이지만 성실히 임하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생길 것이다. 그렇게, 봄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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