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100만년을 담은 소주, 맛보셨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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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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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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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원, 통신실에 혹시 우산 있나 좀 봐줘.” “예? 우산요?” 여기는 남극인걸요. 그런데 우산이라니? 세종기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바로 눈앞에 보고도 믿지 못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맙소사. 남극에, 비가 오다니.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다더니, 이 정도였구나. 슬픈 마음이 들어 아침 회의 시간에 날씨 담당 기상 대원에게 이유를 물었다. 의외로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비? 여름에 올 수도 있지, 뭐. 여기 남극 반도 끝 킹조지 섬이잖아.”

남위 62도, 바다를 접한 세종기지에는 여름철 이따금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는 날도 있다고 들었지만 1년 치 짐에 우산이 들어가야 할 줄은 꿈에도, 꿈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상황 앞에 허허 웃음이 났다. 사막의 난로, 알래스카의 냉장고, 아프리카의 스키에 이어 유능한 영업사원이 팔아야 할 물건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단지 공간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한국에서 반복되던 일상과 물건들은 남극에서 저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갖게 된다. 남극의 우산처럼 수많은 재발견이 이어진다. 김치찌개, 팥빙수, 소주 한 잔, 축구, 이발, 사우나, 노트북, 방한 외투, 안경….

세종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김치찌개는 말 그대로 벅찬 감동이다. 식당 ‘세종회관’에서 ‘남극의 셰프’가 내놓은 이 기막힌 음식은, 긴 여정을 거쳐 도착한 남극 방문객들의 피로를 씻어주고, 고국의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음식으로 탈바꿈한다. 창밖으로 유빙(流氷)이 떠다니는 기막힌 풍경을 바라보며 떠먹는 뜨끈한 김치찌개 한 숟갈의 맛이란!

이어지는 한 사발 팥빙수와 한 잔 소주는 유빙과 함께하며 전혀 새로운 음식이 된다. 기지 앞에서 직접 건져 올린 유빙으로 만든 팥빙수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유빙에 담긴 100만 년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 담은 소주’에는 두터운 지구 이야기가 녹아 있다.

세종기지 앞마당 설원에서 펼쳐지는 설상축구와 족구, 발야구는 묵직한 설상화가 제공한 가상의 중력(?) 덕분에 마치 다른 행성에서 뛰는 듯한 새로운 경험이다. 남극의 헤어스타일은 겨울에 접어들며 삭발과 장발의 두 가지 스타일로 양분되고, 사우나 후 냉탕에 들어가는 대신 푹신한 눈밭에 그대로 뛰어드는 남극식 천연 사우나 또한 두고두고 짜릿한 이야기를 선사해 준다.

주인 덕택에 덜컥 남극까지 따라오게 된 노트북들은 세종기지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고 1만7000여 km 떨어진 가족들을 만나게 해 주는 성실한 비서가 된다. 최근에는 형형색색 스마트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월동복과 방한복은 남극의 겨울 내내 대원들의 자부심이 되어 준다. 블리자드의 강한 바람에 날아가 버린 뿔테 안경. 다음 생에는 위치추적 기능을 장착한 스마트안경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지금도 메리언 소만 언저리 어디에선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오늘도 바람이 분다. 남극이라는 생각 플랫폼을 통해 재발견한 이야기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흙을 반입할 수 없는 남극이지만 수경재배를 이용한 식물공장 덕분에 깻잎 통조림 삼겹살은 어느새 싱싱한 채소 쌈이 됐다. 매주 수확되는 싱싱한 채소들은 다른 나라 기지에도 나누어 준다. 미국 맥머도 기지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놀랐던 것이 수년 전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통신기술은 남극에서 모바일뱅킹과 모바일쇼핑을 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거대한 실험실이자 혁신의 아이디어 제공소. 남극에 다녀온 뒤 지인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하는 이야기가 ‘남극은 연구의 밭’이라는 것이다. 같은 현상이나 같은 연구대상도 남극에서 하면 새롭고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조금 과장하면,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연구, 매일 생각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남극에 가져가서 실행하는 족족 모두 새로운 결과물로 쏟아질 것이다.

대장님이 우산을 쓰고 나가신 지 얼마나 되었을까. 빗줄기는 어느새 눈발로 바뀌었다. 이제야 익숙한 풍경이다. 이야기는 사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찰나의 먼지도 이야기라는 옷을 입고 새로운 기억이 된다. 오늘도 나는 우산을 들고 상상 속의 남극에 가 본다.

이어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사
#세종기지#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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