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유치원 전쟁 관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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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성실하고 야무지기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A 씨. 사내 커플로 결혼해 3년 전과 지난해 두 아이를 낳으면서도 입사 동기 가운데 승진이 빠른 편일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다.

주변의 도움 없이 육아를 책임지는 맞벌이 부부 상당수가 그러하듯 A 씨 부부도 ‘조선의 아이는 조선족이 키운다’는 유행어(?)대로 두 아이를 키워 왔다. 갑작스러운 야근이 잦은 A 씨, 몇 주 단위로 몰아치는 프로젝트가 많은 A 씨 남편의 생활을 감안하면 베이비시터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야근 중에 “아이가 열이 40도까지 오른다”는 전화를 받아도 발만 동동 구르는 순간, 어쩌다 부부 모두 주말 출근령이 떨어지면 애 봐 줄 사람을 구하느라 진땀을 빼는 날들, 평소에 아이를 키우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쉬는 날이면 잠을 더 줄여가며 아이들을 돌보느라 다크서클이 판다 부럽지 않은 생활….

하루하루가 전쟁인 A 씨 부부에게는 이틀 전도 이런 일상의 연속이었다. 오후 6시가 넘었지만 퇴근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A 씨의 여동생이 생후 70일짜리 신생아를 끌어안고, A 씨의 시어머니가 두 다리를 절뚝이며 A 씨네 집에 모여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만이 평소와 다른 점이었다.

일하는 딸 대신 8년간 밤낮으로 손주 둘을 키워낸 끝에 일흔을 넘겨 무릎수술을 받은 A 씨의 시어머니나, 임신 이후 퇴사를 종용하는 중소기업에서 간신히 석 달간 출산휴가를 얻어낸 A 씨의 여동생이나 피차 누군가를 도울 처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A 씨네 맏이의 유치원 추첨에 ‘참전’하기 위해 이날 어려운 걸음을 해야만 했다. A 씨네는 이미 유치원 두 곳의 추첨에서 고배를 마셨다. 지금까지 세 번째 바뀐 베이비시터는 “요즘 남자애 둘을 다 집에서 보는 사람은 없다. 내년에는 큰애를 어디라도 보내지 않으면 더 이상 일하기 힘들다”고 예고한 터였다. 부부 모두 도저히 정시퇴근을 할 수 없었던 이날, 동네 유치원 세 곳의 추첨일이 겹치는 바람에 시어머니와 여동생이 출동한 것이었다.

결과는 역시 낙첨이었다. 경쟁률이 수십 대 1인 국공립 유치원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사립유치원도 8 대 1의 경쟁률을 뚫지 못했다. 이제 남은 두 곳의 추첨까지 떨어지면 A 씨는 또 새 베이비시터를 구하거나, 그나마 자리가 있는 월 85만 원짜리 놀이학교에 아이를 보내야 한다.

“베이비시터가 바뀔 때마다 힘들어하는 애들을 떼어놓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A 씨는 둘째를 낳고 복직한 이후 자주 몸살을 앓을 때 퇴사의 유혹에 빠진다. “종종 후배들한테 술도 사면서 팀워크 관리를 적극적으로 하라”는 상사의 핀잔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출금과 갈수록 불어날 아이들의 양육비를 생각하면 머리를 가로젓게 된다. 최근 몇 년간 동네에 수천 가구짜리 아파트가 줄줄이 생겨도 초등학교의 가건물만 임시로 늘어날 뿐, 유치원은 단 한 개도 신설되지 않는 상황을 보면 정부에 기대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A 씨는 내가 교육 담당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종종 이렇게 묻는다. “언니, 애들 좀 커서 초등학교라도 가면 나아지겠지? 지금처럼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겠지?”

A 씨보다 유치원 대란을 2년 먼저 겪었을 뿐, 별반 상황이 다를 바 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런 헛소리뿐이다. “우리 같이 로또나 살까? 어쩌면 유치원 추첨보다 가능성이 높을지도 몰라.” 워킹맘의 경력단절 사유 1순위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이야기는 묻어둔 채로 말이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유치원#전쟁#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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