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女 성폭행범의 알리바이용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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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찜 식사-할머니에 소개-웃는 여행사진까지 모든 게…
30대 법정증거 제시 강제동거 등 부인… 1심선 일부 무죄 인정 징역 4년
피해자들 “강요-협박탓” 일관 진술… 항소심, 1심 2배 넘는 9년刑 선고

“그날은 제가 희생할 차례였습니다.”

4월 하순, 서울고법 항소심의 한 법정에 마지막 증인으로 선 이모 씨(23·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6년 전 기억을 되짚었다. “친구와 저 둘 중 한 명은 자기하고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아니면 조폭에게 보낸다고 그랬어요. 거기 가면 강간당하고 임신해 쓰레기 인생을 살 수 있다면서….”

불행의 시작은 17세이던 2009년 1월 이 씨가 고액 아르바이트 광고에 혹해 친구와 함께 최모 씨(32)가 관리하던 유흥주점을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최 씨는 그 길로 이 씨를 붙잡아 강제로 성폭행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이 씨에게 포르노를 그대로 따라 하게 하고 나체 사진을 찍는 등 성폭행과 폭언, 폭행을 일삼았다. 이 씨는 이듬해 도망쳤다가 어머니 집에서 잠복하고 있다는 최 씨의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전해듣고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지속적인 폭행 아래 최 씨와의 사이에서 아이 2명까지 출산했다.

법정에 나온 피해자와 증인은 이 씨를 포함해 7명. 상습 폭행으로 두려움에 떨던 피해자들은 우연히 연락이 닿아 서로의 비슷한 피해 사실과 처지를 공감하고 고소를 결심했다. 지난해 10월 1심 재판부인 수원지법은 “피해자들의 행동이 상습 폭행, 강간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해 최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검찰은 전략을 수정했다. 가해자와 같이 웃으며 사진을 찍고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 등 얼핏 납득하기 힘든 피해자들의 행동이 최 씨의 강요와 위력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항소심에서도 최 씨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치밀하게 준비해 온 증거를 하나씩 꺼냈다. “명절에 갈비찜 해놨으니 먹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이 씨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인중개사 시험도 준비했습니다.” “제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낮에 집에 없었으니 도망갈 법도 했고 수사기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는데도 그대로 있었어요.” 최 씨는 자신만만했다.

또 다른 피해 여성 김모 씨(22)와 관련해선 “부모에게 남자 친구라고 소개시켜줬고, 할머니 집에 데려가 밥도 먹였다”면서 함께 웃으며 찍은 여행 사진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증인석에 앉은 김 씨의 말은 달랐다. “여행지에서 제 표정이 좋지 않으면 폭행을 당할 수도 있을까 봐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가족을 해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생일파티도 챙겼습니다.”

최 씨의 주장을 뒤엎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이어지자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 달라졌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허부열)는 청소년 강간, 강제추행,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 씨에게 1심 형량의 2배가 넘는 징역 9년을 선고하고 8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1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을 내렸다고 23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진술 내용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다”고 밝혔다. 최 씨가 제출한 증거들에 대해서도 “일부 우호적 행태를 보였다는 사정만으로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성폭행#알리바이#강제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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