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국군포로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 Array
  • 입력 2011년 2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61년만에 가족 품으로

24세 청년, ‘85세 노병’으로 돌아오다 지난해 3월 고향땅을 밟기 위해 탈북했다가 11월 조국에 돌아온 탈북 국군포로 김모 씨가 9일 61년 만에 남한 가족과 재결합했다. 3개월 동안 안가에서 머물다가 이날 나온 김 씨는 서울 도봉구 여동생의 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4세 청년, ‘85세 노병’으로 돌아오다 지난해 3월 고향땅을 밟기 위해 탈북했다가 11월 조국에 돌아온 탈북 국군포로 김모 씨가 9일 61년 만에 남한 가족과 재결합했다. 3개월 동안 안가에서 머물다가 이날 나온 김 씨는 서울 도봉구 여동생의 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큰누이는 대야에 물을 떠다 댓돌에서 발을 씻기고 마루에 올려놓았지. 그 누이가 벌써 아흔하나라니…. 누이며 동생이며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는데도 옛날 모습만 생각나는 거야.”

탈북 국군포로 김모 씨(85)는 9일 가족과 61년 만의 재결합을 앞두고 지난 세월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1950년 그는 스물네 살 청년으로 집을 떠났다. 그는 이제 흰머리와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 바싹 마르고 등은 굽은 여든다섯의 노인으로 돌아왔다.

61년 만의 귀가(歸家). 멀리 돌고 돌아 온 길이다.

앞으로 그의 보금자리가 될 서울 도봉구의 여동생(76) 집으로 향하는 내내 김 씨는 60년도 넘은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집엔 큰집 작은집 형수님들도 있었는데…‘도련님 귀엽다’고 손등도 쓰다듬어 주고…60년 넘는 세월이라니…. 어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이달 초 설 연휴 기간에 정부의 배려로 가족들이 김 씨가 머물고 있던 곳을 방문해 극적인 상봉이 이뤄졌다. 태어나서 자란 경기 광주시 고향집은 아니지만 이날 ‘가슴속의 고향집’을 찾는 김 씨는 세월의 무게가 버거운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로지 고향땅을 밟고 싶어.” 지난해 3월 북한에 가족을 남겨두고 탈북 브로커 등에 업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죽기 전 고향땅을 밟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탈북에 성공해 제3국의 한국공관에 들어갔지만 해당국 정부가 한국 송환을 허락하지 않아 8개월가량 발이 묶였다. 같은 해 11월 가까스로 조국 품으로 돌아왔지만 정착 훈련 등으로 집으로 오는 데는 또다시 3개월이 걸렸다.
▼ 76세 여동생이 끓인 떡국… 회한 얹어 삼킨 85세 오빠 ▼

귀국 도와준 박선영 의원과도 재회 탈북 국군포로인 김모 할아버지가 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북한이탈주민종합센터에서 자신이 귀국하는 데 도움을 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을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보는 북에 남아 있는 김 할아버지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얼굴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귀국 도와준 박선영 의원과도 재회 탈북 국군포로인 김모 할아버지가 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북한이탈주민종합센터에서 자신이 귀국하는 데 도움을 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을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보는 북에 남아 있는 김 할아버지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얼굴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9일 오후 3시 40분. 승용차에서 내린 김 씨가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한 다가구주택의 2층 집으로 난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오나 보다, 오나 보다”를 되뇌던 주름진 얼굴의 여동생(76)도 현관 앞으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여동생은 아무런 말 없이 허리를 깊이 숙여 다리 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오빠의 발에서 신발을 차례로 벗겨줬다. 오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동생은 소파 위의 물건들을 치우면서 “오빠, 어서 들어와요”라며 자리를 권했다. 아침에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오빠를 맞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릴 적 소년의 발을 씻기던 누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지방에서 상경하지 못했다.

오빠가 실컷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얼마 전 쌀 30kg을 샀다는 여동생은 오빠를 위해 사골떡국을 한 솥 가득 끓였다. “오빠가 안가(安家)에서 사골국물을 너무나 좋아해서 ‘곰탕, 곰탕’ 노래를 불렀대요. 북에서 못 먹고 배곯았던 것을 잊을 수 있도록 배불리 먹도록 할래요.” 김 씨는 “북한에선 떡국 못 먹었어. 강냉이 밥이나 먹지”라며 동생이 끓인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여동생은 떡국을 먹는 오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후 1시경 안가에서 나와 새터민 쉼터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김 씨는 61년 만의 가족 재결합에 대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석 달여 동안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울었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건 기쁜데, 이제는 북에 남은 가족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픈 거야. 하루빨리 통일됐으면 좋겠어. 걔들이 나 때문에 행여 수용소로 끌려가면 어쩌나, 몹쓸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북조선(북한)에 남은 자식들이 불쌍해서…. 나만 이렇게 호강해도 좋은지 이런 생각…. 기쁘고도 슬픈 그 마음,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김 씨를 껴안으며 “저를 기억하세요?”라고 하자 김 씨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계속 보고 싶었는데….”

김 씨가 제3국 재외공관에 발이 묶여 기약 없는 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때인 지난해 9월 18일. 김 씨의 사연을 듣고 찾아간 박 의원에게 김 씨는 “제발 죽기 전에 고향땅을 밟게 해 달라”며 눈물을 쏟으면서 A4 용지 21쪽에 걸쳐 빽빽하게 써내려간 장문의 편지를 전달했다. 이 편지는 동아일보에 자세히 소개됐다.

▶본보 2010년 9월 25일자 1면 84세 탈북 국군포로가 南으로 보낸…

이후 정부가 김 씨의 조기 송환에 발 벗고 나서 그는 돌아올 수 있었다. 김 씨는 이번에도 자신의 소감을 담은 A4 용지 1쪽 분량의 편지를 기자에게 건넸다. 편지는 온통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였다.

1951년 5월 국군으로 강원 인제군 가리봉(설악산 소재) 방어전투에 투입됐다가 적탄에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고 있던 중 북한군에게 발견돼 61년간 고향땅을 밟지 못했던 김 씨. 안가에 있을 때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을 TV로 지켜봤다는 그는 “우리 군인이 많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제 전사자로 처리됐던 옛 호적을 회복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받는다.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61년 만의 귀가’라는 꿈을 이룬 그는 이제 통일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