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2부]<10>5·16 군사정권에 맞서다

동아일보 입력 2010-09-06 03:00수정 2010-11-2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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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정연장 발언에 12일간 ‘사설없는 신문’ 無言의 항의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의장(앞)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당 및 사회단체를 해체하고 모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하는 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이정표였던 1960년 4·19혁명 정신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사그라졌다. 4·19혁명은 오래도록 단순한 학생투쟁에 따른 정치변동이 아니었냐는 논쟁이 있었지만 동아일보는 4·19를 처음부터 일관되게 ‘4월혁명’으로 불렀다. 4·19부터 5·16 전까지 한국은 인권이 보장된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군정 당국에 맞서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1961년 5월 16일 오전 3시. 김윤근 준장이 이끄는 해병 제1여단 소속 1000여 명 등 서울 주변에 주둔하던 3600여 명의 쿠데타 병력이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제1한강교 북쪽에서 헌병대 50여 명의 저항을 물리치고 2시간 만에 정부청사, 방송국, 신문사 등을 장악했다. 쿠데타 세력이 국가의 심장부를 모두 장악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날 석간 1, 3면에 쿠데타 관련 뉴스를 보도했다.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16일 새벽, 군 쿠데타 발생’이었다. 이날 석간은 전면에 걸쳐 군 검열을 받았으며 1면부터 기사가 삭제돼 여백을 남겼다. 쿠데타 사흘째인 18일 사회면은 톱기사가 삭제된 채 신문이 발행됐다. 검열 당국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장면 내각이 5월 18일 사퇴를 선언하고 미국이 쿠데타를 인정하자 쿠데타 주도 세력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각계각층에 통제를 강화했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이름을 바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당 15개, 사회단체 238개를 해체하고 ‘언론·출판 검열방침’에 따른 보도금지 9개 항목을 정해 모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했다. 5월 27일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대체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사전검열은 형식상 철폐됐지만 계엄통치 아래에서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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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검열로 기사 삭제된채 발행 동아일보는 1961년 5월 16일 석간 1면(왼쪽)에 쿠데타 소식을 보도했으나 군 검열로 일부 기사가 삭제돼 빈 곳이 생겼다. 쿠데타 사흘째인 18일 동아일보 사회면은 검열로 인해 톱기사가 삭제된 채 발행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뒤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조간에 ‘윤보선 대통령이 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속히 정권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군정당국은 이날 김영상 편집국장과 정경부 조용중 차장, 이만섭 이진희 기자를 연행했다. 김 국장과 조 차장은 나흘 만에 석방되었으나 두 기자는 한 달 넘게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이 사건은 5·16 이후 최대 신문사의 편집국 실무 책임자가 연행됐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동아일보는 6일자에 ‘본사 김 편집국장 이만섭 기자 연행, 윤 대통령 회견 기사와 관련’이라고 연행 사실을 보도했다. UPI통신은 이와 관련해 ‘한국 경찰에 한국 최대의 신문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기자 1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7월 28일자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게재한 뒤 군정하에서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군사정부는 제3공화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 중이었고 이것이 완성되면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하려는 계획이었다. 군정은 동아일보 사설을 군사혁명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설이 나가자 군정은 이튿날 필자인 황산덕 논설위원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했고 8월 2일에는 고재욱 주필을 구속했다. 김상만 발행인도 중정에 두 차례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신문 사설이 문제가 돼 신문사 주필이나 논설위원이 구속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 주필과 황 위원에게는 반공법 위반이라는 비상식적인 혐의가 적용됐다. 동아일보 최두선 사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난 뒤 고 주필은 석방됐지만 황 위원은 군법회의에서 네 번의 재판을 받은 끝에 검찰의 공소취소로 구속 128일 만에 석방됐다.

1962년 12월 6일 계엄령이 569일 만에 해제됐다. 계엄령 해제를 앞두고 군정 당국은 민정으로 이양하더라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터전을 닦으려고 했다. 중정은 민간단체장, 언론사 간부, 대학교수 등을 끌어들여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만들고 각 지역에 하부 조직까지 구성했다. 하지만 여당 역할을 맡게 될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쿠데타에 공헌한 김동하 소장이 이탈했고 송요찬 전 내각수반이 당초 혁명공약대로 정권을 민간에 넘기고 군인들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군사정부가 정치적 위기를 맞자 박정희 의장은 1963년 2월 18일 민정 불참을 선언했다가 정치군인들의 집요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3월 16일 “과도적 군정 연장이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는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도 공포했다. 이 법에 따라 정치활동과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다시 얼어붙었다. 반대세력의 손발을 묶어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동아일보는 박 의장의 군정 연장 발언에 ‘사설 없는 신문’을 발행하며 대항했다. 사설을 싣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무언의 항의는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12일간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8월 8일 박 의장의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종용하는 송요찬의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서한을 3면 전체를 할애해 싣기도 했다.

박 의장은 이런 동아일보에 공개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대선에 출마한 그는 10월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김성열 동아일보 정경부장과의 단독회견에서 “동아일보가 내 유세장 참석 인원을 의도적으로 축소해 보도한다”고 말했다. 김 부장이 “항공사진을 세심하게 검토해 보도한다”고 반박하자 그는 벌게진 얼굴로 탁자 위 담배함을 집어던졌다. 단독인터뷰는 불발로 끝났다.

다음 날 야당은 박 후보에게 일격을 가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뒤 관련자 처벌을 위한 군법회의에서 박 후보가 무기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이날은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 일요일이었지만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호외로 찍어 전국에 배달했다.

윤보선 후보를 불과 15만6000표 차로 누르고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이후에도 자주 이 호외사건을 불쾌한 표정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동아일보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대선 당일에도 박정희 후보는 동아방송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아방송 김남호 아나운서가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오늘 투표를 마치고 어떻게 소일할 것이냐”라고 묻자, 그는 “동아방송 거짓말이나 하지 마시오”라고 답했다. 이에 김 아나운서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실을 공명정대하게 보도하는 것이 동아의 생명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이 가시 돋친 문답은 동아일보와 군사정부의 갈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비판적 논조로 ‘3共의 언론테러’ 표적 ▼
軍장교들 사옥 난입 난동, 기자 집폭파-폭행 잇따라

1965년 9월 7일 오후 11시 45분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대리의 서울 이문동 집 대문이 폭파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의 당선으로 출범한 제3공화국. 동아일보는 비판적 논조로 권력과 갈등을 빚으면서 언론 테러의 표적이 됐다.

1964년 6월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6월 6일 새벽 제1공수특전단장 최문영 대령을 비롯한 8명의 장교가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숙직 기자를 두들겨 깨운 뒤 40여 분 동안 소란을 피웠다. 5월 같은 부대 군인들이 시위 학생에 대한 판결이 관대하다며 법원에 집단으로 난입한 사건을 동아일보가 맹렬하게 비난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이 사건은 계엄 아래 사전검열 탓에 보도되지 못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결국 계엄당국은 6월 8일 동아일보사와 국민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걸핏하면 벌어지는 취재기자와 간부에 대한 연행과 조사 등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당국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65년 9월 7일 오후 11시 45분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대리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집 대문이 폭파됐다. 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대문 안벽이 허물어졌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이어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8일 0시 40분경에는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현 무용전문지 춤 발행인)이 납치돼 몰매를 맞았다. 괴한 4명은 “시경에서 왔다”며 조 과장을 자택에서 납치한 뒤 뭇매를 때려 턱 가슴 옆구리 무릎 등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동아일보는 1966년 3월 25일부터 ‘독주(獨走)’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최영철 기자의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기사를 통해 최고 권력자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어떠한 소신일지라도 이를테면 대통령의 소신일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 소신대로 하라.’ 그러나 무한책임은 바로 무책임과도 통하는 것이 통치의 세계다. 더구나 책임은 한 사람이 진다해도 그로 인한 무거운 불행의 멍에는 3000만이 두고두고 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기사가 나간 지 1개월 뒤인 4월 25일 오후 8시 10분경. 귀가하던 최 기자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자택 부근에서 2명의 청년에게 폭행당한다. 현관 안쪽에서 발견된 흰색 봉투에는 “최영철 펜대 조심하라. 너의 생명을 노린다-구국특공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언론인 테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또다시 최 기자 피습사건이 발생한 것은 민주언론의 창달을 위해 불행한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범인을 색출해 그 진상을 국민 앞에 밝히라고 촉구했다.

7월 20일에는 권오기 정치부 차장이 귀가하다 최 기자를 폭행한 괴한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범인들에게 다시 폭행을 당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잇달아 테러를 당하자 엄민영 내무부 장관은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범인 체포에 현상금까지 걸었다며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사건들은 수수께끼로 묻혀버렸다. 같은 해 12월 29일에는 상이군경회 회원 50여 명이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기자들을 폭행하면서 난동을 부렸다. 전날 실린 ‘취직 미끼 300만 원 사취, 상이군경회 두 간부 구속’ 제목의 기사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이에 동아일보는 12월 31일자 송년 사설을 통해 힘이 도의를 이기는 정치를 비판했다.

“언론에 대한 폭력의 보복이 얼마나 결정적인 민주질서에의 도전인가 하는 일반론도 우리 현실에서 요원하기만 한 이야기다. …벌거벗은 힘이 도의를 이기는 정치, 돈의 액(額)이 법률을 비웃는 경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회, 이 모두가 폭력의 온상이 아닌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서의 폭력문제는 훨씬 깊은 데서부터 파헤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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